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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사쁨 Nov 20. 2024

치약 때문에 울었던 날

공감은 목적어에 있지 않다.

양치를 안 하겠다고 한다. 아침이면 곤히 잠든 아이를 업고 나와 등원하는 차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는데 오늘은 밥을 안 먹겠다고 하더니, 밥은 먹겠지만 어린이집에서 치카는 하지 않겠다고 짜증에 짜증을 부린다. 눈물까지 그렁그렁 고여서는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다. 같이 내지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붙여잡고 하이를 향해 몸을 돌렸다. 눈을 맞추고 또박또박.


"어. 알겠어. 하지마."


"그런데 하이야, 양치를 하지 않으면 입에서 냄새가 나. 그리고 충치가 생겨서 나중에 병원에 갈 수도 있어. 이 두 가지는 하이가 알고 있어야 해."


아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어 기어코 양치를 시킬 셈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할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였을까. 눈물 바람 더 세졌고, 그제 속사정을 털어놓는다.


"치약이 안나온다그!"


'아, 그랬구나' 이해가 되니 풀석이던 감정이 진정된다. 그러더니 어린이집 세면대 앞에 내가 선다. 시공간을 초월한 감정적 일체감에 다 쓴 치약이 내 손에 쥐어져 있는 듯 여섯 살 하이가 되어 그 떨림을 나도 느낀다.


"응 알겠어. 하이가 양치를 해야하는데 치약이 안나와서 당황스럽고 힘들었다는 말이지?"


위아래로 끄덕이는 고갯짓도 슬프다. 계속 흐르는 눈물이지만 아까는 성이 나서, 지금은 설움 범벅이다. 럴 때는 생님께 도와달라고 하면 된다고 했지만 그건 못한단다.




어린이집까지 10분 남짓 되는 그 시간 동안 운전하랴, 이와 대화랴, 해결 방법 찾아내랴 정신이 없었다. 새 치약을 보내야 하나? 선생님께 도와 달라고 직접 말씀드릴까? 문제를 제거해 주는 것도, 하이가 해야 할 말을 내가 대신 해주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하이가 뭔가 배우고 스스로 해내도록 돕고 싶은데 도대체 모르겠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을 만큼 할 수 없는 그것을 마냥 하라고만 밀어붙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선생님, 하이 치약이 잘 안나오나봐요. 그래서 그럴 땐 선생님께 도와달라고 말씀 드리면 된다고 알려줬어요."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만 전달했다. 치약 좀 짜 달라고 대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지만 왠지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이도 한결 편안한 눈빛으로 어린이집으로 쏙 들어간다. 그 이후로 양치 안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해결이 되긴 된 모양이다.




하이 말로는 치약이 안 나오는 바람에 물로만 양치를 했다고 했다. 비록 오늘양치 포기 선언을 했지만 치약이 나오지 않았던 그 순간에는 치약 때문에 울지 않았고, 치카를 안 한 것도 아니고, 제 나름대로 대안을 찾아 어떻게든 해보려 했다니 기특하다. 그렇게 할 수 있으면서 도대체 내 앞에서는 왜 그리 서럽게 울었던 걸까.


정말 작은 일이다.

"도와주세요." 한 마디만 하면 되는 일. 

치약 그게 뭐라고.

쓴 치약, 돌돌말아 쥐고 짜고 문질러도 나오지 않는 치약. 

그게 뭐라고.


그런데 그 치약 나도 있다. 하려고 해도 안 되는 것, 잘 하고 싶은데 안 되는 것 나도 있다. 실패라고 느껴지는 순간의 좌절감, 하고는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막막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싶은 절박함. 하이가 흘린 그 눈물 나도 흘려봤다. 어떻게 해도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문제 앞에 지금도 운다. 하고 싶은데 할 수 없을 것 같으면 눈물부터 난다. 나도 그랬다.


누가 누구의 거울 걸까. 부모가 자녀의 거울이라고? 아닌데. 나를 비춰주는 건, 여섯살 하이다. 하이가 물어온다. 엄마도 하고 싶은데 안 된적 있었냐고, 그럴 때 엄마도 속상했냐고, 그럼 이 마음을 엄마도 아는거냐고, 엄마도 알고 있어 다행이라고.  


공감. '치약'이 아니라 '안 나온다'는 그 말을 듣는 것. 목적어 말고 서술어를 듣는 것 그게 공감이다. 공감은 목적어에 있지 않다.


'하이야 치약이 안나와서 당황스러웠어? 어떻게 해야할 줄 몰라 울고 싶었어? 엄마도 그래. 야 하는데 잘 안될때,  싶은데 잘 되지도 않고 못할 것 같을때면 지금도 눈물이 . 우리 하이 양치를 꼭 하고 싶었구나. 그래서 그렇게 속상했던거구나. 하이 마음 이제 진짜 다 알았어.'


공감이 완성되는 순간. 세면대 앞에 서는 상상은 더이상 필요없다.

 



하이깊은 산 속 반짝이는 샘 같다. 저 깊은 바닥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맑고 영롱한 샘. 그런 하이가 너무 예뻐서 한참을 들여다 보면 내가 보인다. 이가 나를 비춰준다. 몰랐던 것 알려주고, 잊었던 것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하이를 통해 다시 산다.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살아본다.


하이가 주는 사유의 힘. 게 바로 내 모든 육아의 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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