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진학 청년 1인 주거 이야기 - 정래의 홈―에세이 3
사소한 물음들에 흔들리지 않는 단단하고 잔잔한 사람이 되어 이름없는 삶을 연대하는 삶으로 바꿔나가고 싶다. 이름이 없다면 이름없는 모든 이들과 함께 살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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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시인의 시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은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에 가입하지 않겠느냐고 화자에게 제안하는 데서 시작한다. ‘자칭 맑스주의자’는 화자에게 묻는다. ‘그런데 송 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요?’ 그의 물음 앞에 화자는 담담하게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자칭 맑스주의자’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유리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라고 화자는 후술한다. 어느 대학 출신이냐는 물음에 알맞은 답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 화자는 그들의 색안경에 대해 ‘싸늘하고 비릿한 유리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라고 태연하게 서술할 뿐 굴하거나 위축되지 않는다. 화자에게 어느 대학 출신이냐는 물음은, 시에 달린 제목처럼 그저 ‘사소한 물음’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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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정말 사소한 물음인데 내게는 영 사소하지가 않다. 학생이시냐고, 어느 대학 출신이냐고 묻는 물음들이 물어오는 쪽에서는 단순히 나를 알아가고픈 가벼운 의도겠지만 내겐 한없이 무겁다. 고시원 방을 계약할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방을 계약할 때, 고시원 사장은 내게 학생이냐고 물었다. 합리적인 물음이었다. 고시원은 대학가 한가운데였으니까. 나는 손사레치며 학생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직장 다니시냐고 묻더라. 그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러자 고시원 사장님은, 그러시냐고, 그러면 뭐 하시는 분이시냐고, 점잖게 물어왔다. 그때는 대답을 적당히 뭉게고 웃어버렸다. 그렇지만 꽁한 마음은 남았다. 뭐 하는 사람이냐니. 그러게. 나는 뭐 하는 사람일까. 나는 어디에 소속된 사람일까. 나는 뭘까, 하는 꽁한 마음이 속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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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익숙한 물음이었다. 대학을 가지 않기로 한 이후로 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좀체 학생이냐는, 대학 어디 다니냐는 물음 앞에 태연지지 못한다. 나는 뭘까, 나는 누굴까, 하는 회의와 자책에 빠지는 쪽으로 자꾸만 마음이 미끌어진다. 대학에 다니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를 설명할 이렇다할 언어를 갖지도 못한 사실 앞에서 작아지곤 한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대학 점퍼를 입은 무리가 앞서 길을 지나갔다. 인근 대학의 마크가 그들 등 한가운데에 크게 새겨져 있었다. 자기네들끼리 무슨 얘기를 하는지 왁자지껄 기뻐보였다. 같은 점퍼를 입고, 같은 학교 학생들과 무리지어 다니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부러웠다. 물론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사연과 고충이 있겠지만, 적어도 어딘가에 적을 두고 무언가 함께할 이들이 명목상으로나마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내 부러움을 사기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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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소개하기에 적당한 이름이 있었으면 좋겠다. 언어 안에 내 자리가 없다. 나를 부를 말이 없다. 언어는 사회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니 언어 안에 내 자리가 없다는 건 사회 속에 내 자리가 없다는 말도 된다. 대학 진학률이 70% 남짓이란다. 그렇다면 나머지 30%는 대학에 가지 않는다는 건데. 30%면 적은 숫자는 아닌데도 청년이면 으레 대학에 갔겠거니 하는 통념이 지배적이다. 학생이냐는 물음이나 전공이 뭐냐는 물음은 자연스레 대학 가지 않은 삶의 존재를 지워버리기 마련이다. 대학-취업-결혼으로 이어지는 정상적인 생애주기에서 이탈한 삶의 존재가 여기 있다. 대학가 한가운데서 비진학 청년으로 살고 있다는 자각이 들 때면 때때로 나의 존재가 지워지면 어쩌다 하는 걱정이 고개를 든다. 서울에서 보낸 시간이 이제 꽤 됐지만 아직도 나를 말할 괜찮은 이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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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럴때마다, 나를 이름하는 말이 정해져있지 않기 때문에 외려 어떤 이름이건 내가 가질 수 있다고, 어디에도 소속돼있지 않기에 외려 모든 곳에 마음붙일 수 있지 않겠느냐고 심지를 다시 굳힌다. 앞서 소개한 시에서 화자는 이어서 말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 저 바다물결에 밀리고 있으며 /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스물하나의 나는 대학에 소속돼있지 않지만 저 들에, 바닷물결에, 꽃잎에, 나무에, 그리고 바람에 소속돼있다고 스스로에게 되내였다. 소속된 곳은 없지만 도리어 그렇기에 모든 곳에 소속되고 연대할 수 있다고 믿기로 했다. 사소한 물음들에 흔들리지 않는 단단하고 잔잔한 사람이 되어 이름없는 삶을 연대하는 삶으로 바꿔나가고 싶다. 이름이 없다면 이름없는 모든 이들과 함께 살면 되니까. 이름 없는 사람들이 모이고 모여 드넓은 들판이 되고 출렁이는 바다가 되리라는 희망을 가져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