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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다협동조합 May 08. 2021

공간으로부터의 자유

비진학 청년 1인 주거 이야기 - 정래의 홈―에세이 4





고시원 옆방 사람부터 옥탑방, 반지하, 비닐하우스, 시설, 그 어느 곳이 되었건 집다운 집에 살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집다운 집을 달라고 요구하는 데서 공간으로부터의 자유는 실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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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을 같이 쓰는 사람들과 점심을 먹다가 꿈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꿈이 뭐냐는 질문을 받았다. 당혹스러웠다. 그런 걸 생각해본지 참 오래되었으니까. 잠시 생각한 끝에 자기효능감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길 바라는 소박한 꿈이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았다. 그날 종일 내 꿈이 무엇일까하는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꿈이 없다기보다 없어졌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테다. 원래 내 꿈은 시인이었다. 시를 쓰고 싶었다. 내가 느끼는 소박하지만 촘촘한 감정의 다발을 시를 통해 함께 나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시를 쓰고 싶어서 찾아보니 내가 아는 시인은 다들 그럴싸한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나도 시인이 되려면 괜찮은 대학을 가야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대학은 가지 못했고 고시원에 산다. 나는 이제 시는커녕 일기를 쓰기도 버거워하는 사람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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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에 살면 내가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인 양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사는 곳이 내 꿈의 크기를 결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게 내 맘대로 되지가 않는다. 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진공지대에 삶을 올려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을 바꾸는 방법은 3가지 뿐이다. 시간을 달리 쓰는 것, 사는 곳을 바꾸는 것,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 이 3가지 방법이 아니면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 일본의 경제학자 오마에 겐이치의 말이다. 사람을 바꾸는 3가지 가운데서도 사는 곳을 바꾸는 것은 특히나 결정적이다. 공간이 갖는 힘은 강하다. 공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그 누구도 없으니까. 사람이 공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얘기는, 고시원의 1평 반쯤 되는 보잘것없는 넓이와, 환기가 석연찮아 방에서 나는 퀘퀘한 냄새와, 부족한 수납공간으로 인해 발 딛을 틈이 없어진 바닥, 이런 따위의 것들에서 내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다. 내가 꾸는 꿈이, 그리는 미래가 딱 거기에 갖힐 수도 있다는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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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걱정하곤 한다. 고시원이라는 공간에서의 삶 뒤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시작하는 문장을 가져다 붙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공간의 크기가 꿈의 크기를, 공간의 질이 꿈의 질을 결정해버리지는 않을까 염려한다. 그런 염려 때문에 고시원 벽 구석에 ‘잡스도 차고에서 시작했다’라고 써붙여놨다. 스티브 잡스도 차고에서 시작해서 혁신을 일궜으니까, 정주영도 쌀집에서 시작해서 산업화를 일궜으니까, 그러니까 나도 할 수 있다, 같은 해묵은 생각들을 얼룩덜룩 뭍혀 염려의 흔적을 지우기 바빴다. 고시원에서 시작해도 성공할 수 있다는, 이른바 ‘성공신화’에 대한 미련 같은 게 내 안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런 미련을 갖고 끙끙대며 한동안 버텼다. 아침에 일어나 담배를 태우고, 자기 전에 또 담배를 태우면서 바깥바람을 쐬며 나도 할 수 있다고 되뇌였다. 공용주방에서 저녁 찬거리를 만들어 방으로 돌아온다. 찬거리를 벽에 붙은 협소한 책상에 올려두고는 고시원 방을 눈으로 한바퀴 훑는다. 문득, 나는 이 공간을 넘어서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넘어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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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그러다가, 정신이 되돌아왔다. 이 공간을 자기계발의 논리로 넘어서는 것만이 답은 아니지. 더 나은 삶을 위한 노력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게 고시원이라는 열악한 공간을 영원히 등지는 방식으로 이뤄져서는 안 된다. 내가 어쩌다 운이 좋아 고시원을 나가게 된다 해도 누군가 다시 이 방에 살게 된다면 무슨 의미일까. 잡스가 아이팟을 세상에 내놓고, 정주영이 소떼를 북녘으로 보내건 말건 나같은 비주택 거주자는 여전히 남아있는걸. 집다운 집에 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라는 문장으로 미담 아닌 미담을 생산해내는 대신 모두가 집다운 집에 살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을 바꿔먹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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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건 단순히 물리적으로 주어진 좁고 열악한 공간에서 나오기 힘든 성과를 이룩하는 것과는 다르다. 공간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건 나 혼자 좁고 열악한 공간에서 산다는 감각을 뛰어넘어 공간의 빈곤에서 오는 고통을 겪는 모든 이들과 내가 함께라는 감각을 얻는 것이다. 고시원 옆방 사람부터 옥탑방, 반지하, 비닐하우스, 시설, 그 어느 곳이 되었건 집다운 집에 살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집다운 집을 달라고 요구하는 데서 공간으로부터의 자유는 실현된다. 몸 하나를 뉘이면 꽉 차는 고시원 방, 이 공간에서, 오늘도 자유롭기를 꿈꾸며 잠들었다. 언젠가 다시 내게 꿈이 뭐냐고 물으면 그때는 멋쩍게 자유롭게 사는 거라고 대답해야지, 하고 상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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