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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은 Mar 01. 2022

역사 바로 잡기

아무도 관심없을 진실을 밝힌다




“너 왜 따라오니”

앗, 몰래 따라붙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만 들켜버렸다. 아, 치밀하지 못했다.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당황하면 안 된다.


“아닌데, 나 너네 따라가는 거 아닌데” 오른쪽 뒤통수를 오른쪽 뒷목에 바짝 붙이며 눈을 내리깔고 턱을 치켜들며 도도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내 생각만큼 내 면상은 그렇게 보이지 않았나 보다. 당연하다, 들켜서 순간 얼마나 당황했는데.

“너 3반이지?” 여자아이가 나를 흘겨보며 말한다.

쳇, 흘겨볼 건 또 뭐람. 따라간 게 뭐 그리 잘못이라고.


“쟤, 아까부터 우리 따라왔다” 여자아이가 자기 손을 남자아이 귓등에 동그랗게 말고 뾰족한 입을 대고 소곤댄다.

다 들린다. 쳇, 저럴 거면, 다 들리게 할 거면 왜 귓속말하는 시늉을 하는 거지. 여자아이는 귀엣말을 하면서도 눈은 바쁘게 나를 흘기며 보고 있다. 눈 따로, 입 따로, 참 얄미운 재주다. 당황해서 자칫 비굴할 뻔 하던 마음이 슬쩍 변한다. 비굴할 수도 있었던 마음이 성으로 변한다.

네가 이렇게까지 하면 내가 화가 나잖아.


“너 아까 우리가 버스에서 내릴 때 급하게 따라 내렸잖아.” 여자아이가 남자아이 귀에서 동그렇게  말고 속삭이던 사악한 손을 떼고, 검지손가락을 치켜들고 내 얼굴 쪽으로 내지른다. 참 바쁜 나쁜 손이다. 나도 화를 내며 뭐라고 쏘아 붙이고 싶은데 아무말도 안나온다.

공격성 제로다.


견학을 하러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이들을 태운 견학 버스의 마지막 종착역은 학교였지만 학교으로 가는 도중 자기 집이 여기에서 가깝다며 아이들이 한둘씩 버스에서 총총 내렸다. 분명 학교에서 내려야 된다는 것을 안다. 분명 생각은 그렇게 하고 있었는데 저 아이들이 버스에서 내릴 때 나도 부랴부랴 모자를 쓰고 가방을 둘러매고 뒤따라 내렸다.






저들 두 명은 하굣길에 늘 보이던 다른반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내리는 순간, 저들을 따라가면 집 근처까지는 빨리 가겠지, 번뜩 꾀가 들었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지만, 저들을 따라 내리면 우리 집이 무척 가까울 것 같았다. 따라 내린 것이 맞고, 그러니 따라간 것이 맞다. 그냥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으면 되었을 것을 몰래 따라간다고 애쓴 것이 화근이다.

혼자 애쓰는 것은 상관없는데 애쓰는 것이 들키면 좀 비참하다.


들켰으면 그렇고 마 하면 될 것인데 아니라고 아니라고 바득 우겼다. 

“나 너네 따라가는 거 아냐. 난 우리 집에 가는 거거든” 다시 턱을 치켜들고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그래? 그럼 너 가는 대로 가봐” 여자아이가 남자아이 옷소매를 길게 잡아 멈추게 하고 제 발걸음도 딱 멈추며 말했다. 남자아이는 크지도 않은 눈을 멀뚱멀뚱 뜨고 나와 여자아이를 번갈아 본다. 뭘 봐, 아무 말도 못 하고 아무 도움도 못 줄 거면서. 저 여자애한테 끌려나 다닐 거면서. 나를 향해 매섭게 노려보는 여자아이보다 눈빛이 멍청한 저 남자아이한테 더 화가났다. 하지만 냉철한 판단력으로 급하게 용서했다. 저 남자아이도 길을 모르는게지.

한 번만 봐준다.


“난 내 갈 길 간다.” 그 말로 변변찮게 자존심을 지켰다. 나는 가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내가 빨리 내 집을 찾아야 이 상황이 끝이 난다. 뒤에서 내 뒤통수를, 나를 보고 있을 아이들을 온몸으로 느끼며 결연하게 전진했다. 성나고 민망하고 불안한 세포가 내 등짝에 고슴도치처럼 뾰족뾰족 솟아나고 있었다. 걸었다. 과단성 있게 계속 걸었다.

봐라, 이젠 너네들이 나를 따라오는 거야.


뒤를 돌아보면 내 눈꼬리 바로 뒤에 그 여자아이 뾰족한 턱이 꽂힐 것 같았다. 나는 아무 잘못 없다는 듯한 남자아이의 흐리멍덩한 눈동자와 눈이 맞을 것 같았다. 그런 턱에 찔리고, 그런 눈과 내 눈이 맞을 수는 없다. 돌아보면 안 돼. 한참을 걸었다. 내가 내 집 가는 길을 모를까 봐서? 씩씩거리는 콧김에 발장단을 맞춰 헛둘헛둘 전진했다. 골목이 갈라져도 직진만 했다. 이 동네가 다 지네 집인 줄 알아? 지가 아는 걸 내가 왜 몰라? 걔는 한마디도 못 하면서 무슨 친구라고 같이 다닌담..

거친 숨결만큼 온갖 거친 생각을 하며 걸었다.


그러다 문득, 내 숨소리, 내 발이 아닌 주변에 시선이 갔다. 여기가 어디지? 발걸음이 살짝 느려진다. 점점 느려진다. 그러다 급속도를 내어 달리다 골목에서 느닷없는 우회전을 했다. 그리고 아무 집 대문 쪽 움푹 들어간 공간에 몸을 숨기고 오던 길을 빼꼼히 돌아보았다. 아이들은 없었다. 까치발로 저 멀리까지 내다 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후유, 배 안에 있던 숨까지 비워냈다. 날숨과 동시에 큰일이다 라는 들숨이 훅 가슴을 치고 들어왔다. 커진 눈으로도 공기가 들어가는 것 같다.

아 큰일이다.






어찌 어찌해서 큰길까지 나왔다. 울지는 않았다. 80년대 그 당시는 길 잃은 아이, 집을 찾아준다 하고는 잡아간다, 팔려 간다는 이야기가 왕왕했다. 계속 걸었다. 멈춰 있으면 누군가 너 길을 잃었니? 네 엄마는 어딨니? 하고 물어올 것만 같았다. 누구에게도 나에게 말을 걸 기회를 줘서는 안 된다. 아는 길을 가는 척 계속 걸었다. 이렇게 계속 가면 안 되는데… 갑자기 살구색 큰 상자가 시야를 턱 가로막았다. 살구색 상자가 길에서 비켜나기를 기다리다가 깨달았다. 아 야쿠르트. 야쿠르트 아주머니가 살구색 아이스박스를 어깨에 메고 길가 상점에 야쿠르트를 배달하고 있었다.


야쿠르트 아주머니에게 여차여차 얘기를 했다. 견학을, 버스를, 못된 아이들을, 우리 집을, 엄마를… 큰길가 상점 어딘가의 전화를 빌려 엄마에게 전화해 주셨다. 전화기 넘어 엄마 목소리에 왈칵 눈물이 났다. “내가 걔네들은 따라간 게 아닌데, 엉엉. 걔네들이 나보고 왜 따라오냐고 엉엉엉 나는 그냥 집에 가고 있었는데”


여기 이 상점 앞에 앉아 있으면 엄마가 오실 거라며 아주머니는 야쿠르트에 빨대를 꽂아주고 떠났다.쯥쯥 야쿠르트 그 진한 단맛에 혀와 목구멍에 막이 한 겹 생기는가 싶더니 익숙한 그 맛에 안정이 찾아왔다. 길가에 앉아 저 길 건너편을 보고 그 너머 골목을 보고 있자니 이제야 주위의 지형지물이 눈에 들어온다. 야쿠르트를 씁씁 아껴먹으며 찬찬히 눈으로 사방을 둘러본다.


어? 저거? 나 저기 아는데. 길 건너 참에 강아지집 파는 가게가 보인다. 바로 지난 주말 아빠와 저기서 파란 지붕의 강아지 집을 샀었다. 저기서라면 우리 집에 가는 길을 안다. 어? 그럼 나 여기서도 우리 집 가는 길을 아는 건데. 신이 났다. 나 길을 모르는 게 아니었어. 거봐, 나 진짜 진짜 그 애들을 따라간 게 아니었어.


멀리서 급한 택시 한 대가 온다. 내 앞에서 끽 멈춘다. 택시가 멈추고, 문이 열리고, 엄마가 튀어 내리는 일련의 동작이 단계적이 아니라 동시에 벌어진다. 열리고, 내리고, 나를 안는 것이 한 번의 동작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신기하다. 다급하게 나를 부여잡고 살피는 엄마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내 눈과 손은 연신 길 건너편 강아지집 파는 가게를 가리킨다. “엄마 저기, 저기 우리 강아지집 산 데 맞지?”

엄마의 어이없는 입이 벌어진다.






엄마는 만나는 사람마다 “얘가 글쎄 길을 잃어버렸다고 길바닥에서 울고 전화해서 내가 미친 듯이 달려갔잖아. 그런 전화를 받으면 사람이 얼마나 놀라. 근데 요게 깜찍하게 다 아는 길을 엄마 오라고 그 생쇼를 한 거 있지”


엄마에게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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