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리미 Oct 07. 2021

국가란 이런 것이다(1)

 8) 국가란 이런 것 이다(1)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바라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     

1960년 존 F 케네디가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한 말이다. 그 때 막 대학생이 된 나는 정치에 전혀 문외한이었으면서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명연설이 이었다. 

당시 케네디는 40대 초반의 젊고 패기있는 신인 정치인으로 예쁘고 얌전하게 생긴 부인과 더불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까지 인기가 상당했던 대통령이었다. 

많은 것을 국민에게 해준 나라만이 국민에게 자신 있게 해 줄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국민에게 아무것도 해준 일이 없는 나라의 지도자는 이런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없다. 

문화 대국이나 예술 대국은...국민 스스로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한 부분이 더 많다. 숨 막히는 헝그리 정신이 예체능을 통해 발휘할 수 있다. 세계 제일의 경제 대국, 세계 제일의 국방 대국,...등은 국가가 거대한 국책으로만 이루어 질 수 있다. 

케네디의 이 말은 미국이라는 한 국가에서 조그맣게 치솟고 있던 분수를 엄청난 기운으로 폭발시키게 한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미국은 정치와 경제와 국방이 안정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승자도 패자도 모두 망가져 버린 유럽의 전쟁에 늦게 참석을 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준 미국은 한참 국력에 물이 오르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15년, 올림픽에서 늘 1등을 했고 할리우드는 대작을 연달아 발표하며 세계의 영화시장을 점령했다. 국방은 세계를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미국은 전 세계 국민들의 동경이 대상이었다. 그 때는 집안 식구들 중에 누가 미국에 유학을 갔다면 대단한 자랑거리로 사둔의 팔촌까지 우쭐거리던 시대였다. 세계의 뉴스는 곧 미국의 뉴스였다. 

미국 영화를 부러움에 찬 시선으로 보며 제일 부러운 것이 화장실이었다. 쪼그리고 앉지 않고 냄새도 맡지 않고 의자에 앉아서 일 보는 것이 신기했다. 수도 꼭지만 틀면 뜨거운 물 찬 물이 나왔다. 냉장고라는 것이 있어 김치가 쉬어 터지지 않고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른들은 식구대로 차가 있고...방방마다 TV가 있다는 말이 거짓말 같았다. 우리는 그 때까지 라디오 시대에 살고 있었다. 찌는 듯한 삼복더위를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에어컨이 있었지만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는 아직 몰랐다.

겨울 추위에 온돌은 뜨거워 디질 지경이지만 위풍이 심해서 체질적으로 호흡기가 약했던 나는 감기를 달고 살았다. 보일러 시설은 학교나 은행에서나 달고 사는 걸로 알고 있었다.

미국이 그렇게 된 것은 사람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나라 땅 자체가 넓고 자원이 풍부해서 부자나라가 된 것이라는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 기억났다. 

일제 점령기, 한국 전쟁을 치루었던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고 천연자원도 없고 백성의 머릿수도 적어서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도 선생님은 늘     

“기름 한 빵울 안 나는 나라에서 택시만 타고 다닌다.”     

한 빵울 이라고 강조하였다.

부산 피난민 시절 젊은 청년 교사로 의기와 공의로 차있던 선생님은 어린 제자들 앞에서 정치에 대한 억울한 폭발했던 것 같다. 선생님이 개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때 대통령은 이승만 박사이다. 나중에 아버지한테 들은 얘기지만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피난을 하지 마십시오. 수도 서울을 사수해야 합니다...

라디오에서 발표되었을 때 이 승만 대통령은 이미 한강 다리를 넘어 대전으로 뺑소니 친 후였다. 이 박사님은 수도를 버리고 도망간 선조대왕이와 같은 클라스였다.

그것도 모르고 한강 다리를 건너 피란을 하던 백성들 위로 미군의 포격이 시작되었고 피난민들이 뒷 사람들에게 밀리고 밀려서 끝없이 한강에 고꾸라지며 추락했다.      

사사오입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국회에서 이박사의 3선이 거론되기 시작한 무렵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재선만 할 수 있던 때였다. 이 박사는 3선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국회에서 투표한 결과 사사오입으로 간신히 과반이 되어 3선 출마가 가결이 되었다. 6힉년이라 학교에서 배웠기 때문에 사사오입이 무슨 말인지 알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꼭 그렇게까지 해서 3선 대통령을 해야 할까 초딩이 혼자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그런 대통령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바라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


그 여러분은 이미 대통령을 위해서 젊은 목숨을 떼거지로 버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설왕설래하던 미통당이 김종인에게 비대위원장을 위임을 했다. 김종인은 필자보다 나이가 두 세 살 위니까 같은 세대에 산 셈이다. 그가 초장에 잠깐 내세웠던 총선 캐치 프레이즈가 있다. 이 말은 6. 25 전쟁이 휴전을 하고 서울로 환도하면서 처음으로 치른 대선에서 야당이 내건 표어였다. 그 당시에는 표어라고 불렀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     

중학교로 가는 등굣길 경복궁 돌담엔 이 포스터가 붙어 있었으니 아마도 할아버지가 당시 나도 들었을 만큼 유명한 법조인인 김 종인씨도 읽어보며 등하교를 했을 것이다.      

“갈아봤자 소용없다”       

포스터라는 이름으로 경복궁 돌담 밑에 붙었던 댓글이었다.

그 후 4.19가 터져 이 박사는 90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눈이 새파란 영부인과 함께 하와이로 뺑소니를 쳤고 얼마 후에 작고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초등학교는 전쟁 중이라 6번을 옮겨 다니며 간신히 서울에 돌아와 졸업을 했다.

중학교 시절은 꼬마 건설 노동자가 되었다. 학교가 폭격으로 거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있었다. 프라이 홀, 심슨 홀 두 건물만 남았고 기숙사며, 체육관, 강당 등이 벽돌 흔적만 남아 있었다. 

그 두 건물에서 중고등에 예고까지 섞여서 공부를 했다. 아마 세계에서 학생 밀도가 가장 좁은 환경에서 공부했을 것이다. 너무도 비좁아 2학년이 되면 궁정동 분교로  유학이 아니라 유배 생활을 1년간 해야만 되었다. 

노동에서 해방되고 팔판동에 살고 있던 집과 가까워서 전차도 타지 않아서 1년간 편하게 학교 생활을 했다. 지금은 청와대라고 하지만 당시엔 경무대 앞 조용하고 깨끗한 길을 10분 정도 걸어서 분교를 다녔다.  경복궁 돌담에는 신무문(神武門)이라고 쓴 작은 문이 있었다. 중학교 2학년 한문 실력으도 읽을 수가 있어서 매일 무슨 문일까 궁금해하며 다녔다.

중 3때 고등학교 건물도 건축이 시작되었다. 

가마니에 명령받은 분량만큼 벽돌을 담아 정동이 있는 중학교 마당에서 서대문구에 위치한 고등학교 작업 현장까지 교내의 언덕길과 골목길과 숲길을 끌고 가는 작업이었다. 

말이 교정 안이었지만 정동에서 서대문까지는 먼 거리였다. 벽돌을 작업장에 내려놓으면 손목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서울 거리가 온통 다 재건하는 모습이었으니 너무도 익숙한 모습이었고 당연해 해야 할 일로 여겼다. 불평하거나 짜증조차 부려 본 적이 없었다.

어느 날 서대문 부지에 우뚝 서 있는 고등학교 건물을 보았다. 건물엔 네 가지 색깔이 한구석에 칠해져 있고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전교생이 건물 색깔을 골라 투표하는 시간이었다. 투표 결과가 은은한 하늘색이 선택되었다. 

그 자랑스러운 건물을 제일 먼저 다니게 되는 영광의 고1 학생이 되었다. 

오랜만에 학교다운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교실마다 라디에이터가 있어서 한 겨울에도 훈훈했다. 도시락을 라디에이터 위에 놓아두면 점심에는 뜨끈뜨끈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당번은 뜨거운 물을 주전자에 받아 다가 도시락 뚜껑에 부어주었다. 고등학교 3년 까지 비교적 안정적인 마음으로 아름다운 학교를 사랑하며 공부했다.

그 때 내 꿈은 신문 기자나 소설가나 역사 선생이나 피아니스트 등 등....여러 가지로 변화무쌍했다. 그 어려운 중에도 미술 전람회, 클래식 음악 다방, 스케이트 장을 다녔고, 밤새워 책을 읽는 독서광이었다.

프랑소와즈 사강이라는 19세 프랑스 소녀가 쓴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소설이 출판되어 나를 자극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폐결핵이 걸려 학교를 장기 결석을 해서 하루 종일 소설만 썼다. 몸이 좀 나아지자 피아노도 열심히 쳤다.  

게다가 영화광이었다. 중 2 때 워터 프런트(Water front)라는 영화를 보고 

“말론 부란도” 라는 불량스럽게 생긴 배우가 매우 멋있게 보여 처음으로 이성의 외모에 대해 느낌을 갖게 되었다. 

인사동에 있는 “르네쌍스(Renaissance)"라는 클라식 음악 감상실에는 클라식 마니아들이 꽉 차 있는 차 집이 있었다. 30여 평 되는 홀은 어둑컴컴했다. 앞 쪽 벽면에는 흐미한 불빛이 비추고 지금 레코드에서 연주하고 있는 연주자,작곡가, 곡명, 곡 넘버, 장단조 까지 써 놓은 칠판이 있었다. 

이 음악실을 중 2 때부터 다니기 시작해서 시간만 있으면 달려가 고전 음악에  열중했다. 하루에 대여섯 시간도 들은 적이 있었다.  내가 제일 먼저 기억한 곳은 루시니의 세빌리아 이발사 서곡이었다. 그리고 쇼팽의 피아노곡 즉흥 환상곡을 좋아하게 되었고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에 심취하는 과정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공부를 잘했으면 좋으련만 취향이 다양하다 보니 공부보담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다고 궁시렁거렸다.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시험 때만은 열심히 공부를 해서 고등학생이 알아야 할 부분은 대충 알고 넘어가는 만큼 약은 구석도 있었다. 

그러나 물리(物理)만은 뭔 소린지 몰라 겨울 방학 때 딱 한 달 학원에 다닌 적이 있었다. 물리의 개요라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새벽 5시 반 전차를 타고 종로 학원에 가서 6시부터 1시간 동안 강의를 들었다. 한 번도 결석한 적은 없었다. 발에 얼음이 백여 그해 겨울 동안 가려워서 고생했던 기억이 남는다. 털 구두같 은 건 만들 생각도 못할 만큼 나라가 가난하던 때였다.


4.19가 터졌다

새로 탄생한 장 면 정권은 준비된 정부가 아니어서 중학생이 보기에도 서투르기 짝이 없었다. 열정에 못 이겨 혁명을 일으킨 젊은 층의 요구 조건이 많았다. 불평도 많았다. 나라가 미처 다 수용을 못 했다. 혼돈의 극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고 새면 내무장관이 붙잡혀 갔고 이박사님의 양자가 친가족과 함께 자살을 했다는 신문 보도가 신문에 도배되었다. 

그 유명한 케네디의 대통령 취임 연설이 회자 되고 있었지만 국가는 국민을 위해 해 주는 것이 없었고 혁명을 일으킨 젊은이들은 기다려 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 혼란 속에서 4.19 혁명은 군사 5.16에 쿠데타에 묻혀지고 말았다.     

5.16 때 

대학생이 된 나는 국가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 되었지만 정부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여자 대학이라는 천국 같은 캠퍼스에서 공부하고 연애하고... 현실에 대한 공감력은 전혀 없이 남의 일처럼 접어두고 팔자 좋은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젊은 대학생과 의식 있는 여대생들에 의해서 나라 안은 박터질 지경이엇는데 나는 무관심한 지성으로 군부 독재를 무덤덤하게 보고 있었다. 두 번만 대통령 하겠다고 해서 그런가 했다. 두 번이 넘자 한 번만 더 하고 그만 두겠다고 했다.

제 1대 대통령이 하던 짓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었다. 전문 용어로 말하면 역사의 되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군사정치의 시퍼런 서슬에 정치가들은 벌벌 떨었지만 대학생들의 시위는 요란했다. 두 번이 세 번이 되고 마침내 네 번으로 이어 지자 세상은 폭발 지경이 되었다 무관심의 대명사인 나 조차도 너무한 거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전국적인 학생 데모가 거센 파도처럼 밀어닥치곤 했다. 사회인도 참여를 했다.

데모를 하지 않은 사람도 최루탄에 시달렸다. 길이 막혀서 버스는 노상 돌아다녔다. 닭장차에 대학생들이 떼거지로 실려 가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때 문재인도 대학생으로 닭장차에 실려 갔다가 복학은 못 하고 바로 군대로 갔고 박근혜는 청와대에서 살았다. 둘은 동갑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다. 정반대의 젊은 시절을 살았던 동갑내기 문재인과 박근혜를 엮어 대하 연속극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한 사람은 감옥에 가고 한 사람은 대통령의 영애로 살았다. 

그 30여 년 후 그들의 지위는 바뀌었다.  감옥에 갔던 대학생은 이러저러한 삶을 살다가 여자 대통령의 뒤를 이은 대통령이 되었고 대통령의 딸도 이러저러한 삶을 살다가 초대 여자 대통령까지 되었다가 뒤를 이은 대통령 재판부에 의해 정부에 의감옥에 끌려가 있다. 얼마나 기막힌 반전의 반적을 이은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거대한 역사적 사실은 너무도 극적인 대비를 이루어 근대사 드라마 소재로는 엄청 극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웅대한 꿈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나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고문 받던 학생이 죽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억 하더니 악!! 하고 죽었다는 말이 유행이 되었다. 인혁당 사건도 이 즈음에 일어났던가. 매우 비민주적이고 야만적인 사건이라고 이라고 혼자 분노했던 기억이 난다.

정치와 정치가에게 무관심하고 철없던 초단 주부였어도 지금까지 기억하는 사건이다. 그걸 기억하지 못할 대한민국 백성은 없으리라. 그렇게 암울하던 시대가 십 수 년이 흘렀고 나는 아들 3형제의 엄마가 되었다.

광복절에 느닷없이 빅 뉴스가 터졌다. 

육영수 여사 피격.....대통령은 납작 엎드려 피해서 살아났다. 마침 그때 8.15 특집을 흑백 TV로 보고 있었다. 육 여사는 상황 판단이 안 되었는지 그대로 똑바로 앉아 있었다.

대통령 직 네 번이 다섯 번으로 이어지자 마침내 내부 총질이 시작되었다. 역사의 가르침은 얄짤 없었다. 그가 한 일이라곤 일본과의 싸구려 협상을 한 일이었다. 덕분에 고속도로도 놓고 포항제철도 만들어서 자신의 치적으로 남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국민 정서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신문 보며 혼자 분노했다.

내가 기억나는 그의 치적은 젊디 젊은 학생들을 이렇게 체포하고 저렇게 죽이며 그와 반대하는 생각들을 무지막지하게 그리고도 간단하게 처리한 일이었다.

지금의 꼴통들은 그의 정권시대의 평화와 경제발전을 그리워한다고 한다. 

원래 독재는 평화로운 법이다. 

총칼 앞에 백성들은 무력하고 그래서 얌전하고 조용하다.      

로마의 카이사르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후 다시 8년간의 전쟁으로 전 유럽을

통일한다. 뿐만 아니라 중동의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 유역까지 자국국토로 만든 영웅이었다.

그는 개선한 후 너무도 넓어진 전 유럽을 통치를 하기 위해서는 공화정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다. 넓어도 너무 넓어진 유럽 전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공화정 보담 독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제왕 제도를 부활하려다가 친 공화정 파에게 피살당하고 말았다  

카이사르는 영토를 넓히고 국격은 최고였고 국민들에게 한없는 명예심을 주었지만 독재 만큼은 용서할 수 없는 시민에게 의해서 칼에 찔림을 당했다. 카이사르를 찌른 시민은 아들처럼 아끼던 사람이었다.

부르터스, 너까지....!! 독재를 꿈꾸던 한 영웅의 최후 독백이었다. 공화정 유지를 위한 실력자에 대한 피의 쿠데타는 실패를 했다. 카이사르가 남겨놓고 간 군사적인 막강한 힘과 조직은 남아있었기 때문에 쿠데타를 일으킨 이들은 삽시간에 잡혀버리고 카이사르의 양자 아우구스투스에 의한 독재 왕정이 시작되었다. 

우리나라는 총성 없는 쿠데타가 일어나고 있었다.

                                                      

                                                                2020  1.

작가의 이전글 선한 이웃(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