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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리미 Oct 19. 2021

국가란 이런 것이다(2)

총성없는 쿠데타

 9) 국가란 이런 것 이다(2)           


대통령의 사후 군사 쿠데타 일어났다. 

또 야? 

나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총성 한 방 들리지 않고 하룻밤 새에 일어났다.  

2차 군부 구데타가 성공하여 10년 넘는 정치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총을 맞아 시해당한 대통령과는 잘 알고 있는 부하들이라는 말이 돌았다. 

귀찮아서 그 자세한 내막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역사를 잊은 대책없는 군인들이 또 있었던 모양이다.  으르딱딱 거리는 공포 정치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머리칼이 좀 길어도 길거리에서 머리 꼭지에 고속도로가 만들어 졌고,  인상이 산만하다고 청송대로 붙들려 갔다. 치마가 짧다고 지적질을 당하는 젊은 아가씨들도 있었다. 

거리는 최루탄 연기로 뿌연 회색빛이었고 도망 다니던 대학생들이 닭장 차에 매일 실려 갔다. 

대학살로 이어진 5.18 사건으로 광주는 금단의 도시가 되었다. 

젊은이들이 죽어 나가고 시국사범이라는 분들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던 때였다.

몇 년이 지났는지 잊어버렸지만 단임제의 임기로 선거에 의해서 당선된 정권이었지만 쿠데타 독재 정부라는 그들의 정체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다니던 여자 대학은 그런 면에선 천국이 따로 없었다. 아무도 시위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이 없었고 앞으로 그들의 부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건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이 그저 명랑하게 깔깔대며 낙원에서 대학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가정과에 다니던 고교 동창이 모대 대학생들과 그룹 미팅에 나갔다. 마침 케네디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의 중심이 되었는데 가정과 친구가 


"케네디가 누구에요?"

 

하고 물었다는 것이다. 

여대생의 개그인 줄 알고 아무도 웃지도 않고 들은 척도 안 하고 얘기가 계속되었는데 친구는 케네디란 이름은 귀에 익었는데 전혀 기억에 없어서 다시 물었단다. 

그녀의 물음이 농담이 아니고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남녀 미팅 멤버들이 놀라서 뒤로 자빠졌다는 얘기를 하면서 나까지도 배를 잡고 뒹굴게 만들었다.

이런 개념 없는 여대생들이었으니 나중에 그 시대 고위층 인사들의 아들들과 결혼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여대생들은 졸업을 하고 그 해에 시집을 안 가면 퇴물 취급을 받던 아주 올드한 시대였다.      


세 놈의 사내 아들들과의 전투와 더불어 가르쳐야 하는 피아노 제자들과의 전쟁은 귄위적인 군부 세력과 싸우는 것 못지않게 살벌한 세월이었다.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밥을 먹을 사이도 없었다. 식사를 하다가 학생이 와서 가르치려고 나갔다가

돌아오면 밥상에는 김치 조각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남자들 네 명과 사는 살벌한 날들이었다.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남자들은 지능이 똑같은 모양이어서 지들 배만 부르면 되었다.  

하루는 앞집 아줌마가 뛰어들며 둘째 녀석이 혼자 어딜 가고 있다고 신고를 했다. 가르치다 말고 뛰쳐나갔다. 둘째가 아장아장 골목길을 걸어 나가고 있었다. 9달이 되어서 걷기 시작한 녀석은 24개월도 못 채운 주제에 혼자 가출을 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어디까지 가나 보려고 뒤를 따랐다. 

펭귄처럼 뒤뚱거리며 잘도 긴 골목길을 직진하고 있었다. 아가들은 직진을 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혹시 잃어버리면 직진을 해보라는 충고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아기 걸음으로 20분은 걸어야 할 거리를 지치지도 않고 꾸준히 걸어가고 있었다. 

동네 가게가 나타났다. 녀석은 가게 앞으로 가더니 탐스럽게 벌려놓은 사과 하나를 덥석 쥐고 먹으려고 하고 있었다.나는 놀라 한 걸음에 뛰어가 아이의 사과를 받아 쥐고 제 장소에 놓았다.

사과 먹고 싶어? 물었다. 

아가는 엄마 얼굴을 알아보고는 까까 까까...했다. 얼굴을 아는 주인 아줌마에게 잠깐 외상을 달라고 하고 몇 알 사서 아이 가슴에 안겨 주었다. 

시어머님이 오셔서 장을 담가주고 계셨다. 나는 일찍 온 아이들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었다.

어머님은 끓여낸 간장을 넓은 다라이에 붓고는 다시 간장을 대렸다. 그 일을 하루종일 하고 계셔서 큰 다라이는 간장이 어지간히 차고 있었다.

피아노 친 아이를 전송하고 간장 대리는 곳으로 가 보았다. 어머님은 장독대에 올라가 있고 간장을 대려 넣은 커단 다라이에는 다 타고 남은 연탄재가 목욕탕에 들어 앉은 어른처럼 으젓하게 앉아 있었다.

어머님....장독에 올라가 있는 시모에게 비명을 지르며 손은 연탄을 가르키고 있었다. 어머님은 이미 알고 계신 듯 어쩌니....다시 대려야지...하신다.

부엌에 끓이는 것이 많아서 바깥 건넌방 연탄 불에 밥을 앉혀놓았는데 두 살박이 둘째 녀석은 밥솥에 열심히 흙을 집어 넣고 있었다. 지금은 교회 찬양대 지휘를 하는 음악가가 되었지만 예수님 오병이어의 기적을 그때부터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모래가 쌀이 되는 기적은 아이들에겐 기적도 아니겠지만... 

둘째는 원체 잘 울지도 않고 보채지도 앉는 순한 성격이었지만 가끔 이런 어이없는 짓으로 엄마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그 아이의 이런식의 프로그람은 조금 더 있지만 그만하고 막내와는 또 어떤 씨름을 했는지 밝히고 싶다.


아침에 이곳 저곳 가구를 옮기고 났더니 너무 힘들어 잠시 누워 쉬고 있는데 앞집 아이가 들어와 막내가 차에 치었어요...운전사 아저씨가 병원으로 데리고 갔어요 한다. 아이는 어느 병원으로 갔는지 알고 왔다.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갔다. 왼쪽 종아리며 발등이 길게 찢어져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눈 탱이는 밤 탱이가 되어 침대에 누워있었다. 

큰 애와 둘째는 커서 학교에 가고 없다. 5살이 된 막내는 동네 형아들이랑 아파트 촌에 가려고 길을 건너다가 11톤 추럭에 치인게 아니라 받쳤다는 운전 기사의 말이었다. 놀란 가슴이 좀채로 멈춰지지 않았다.

종합대학 병원에 3달이나 입원하며 집안 일이며 피아노 일은 전폐하고 있었다.

어쩌다 한 번 짬을 내어 집에 가보았다.

그동안 마루의 분합문 유리창은 거의 다가 작살이 나 있었다. 마당에서 동네 아이들이 매일 야구를 했다니 알만하다. 야구 뿐이 아니다. 초딩 5년 생이 된 맏 아들과 둘째가 동네 아이들 다 모아놓고 총쏘기를 하며 놀았단다. 

포도나무 그늘에 놓았던 정원용 탁자와 의자는 총소리를 막는 방패막으로 차출되어 서 전쟁에 이겼는지 졌는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난장판으로 딩굴고 있었다.

얼마나 뛰고 발광들을 했으면 온돌의 아랫목도 눌려있고 장판이 찢어져 있었다. 친정 아버지가 연탄 개스가 나올까봐 얼른 고쳐놓았다고 하셨다. 

이런 살벌한 와중이었다. 


독재 정치에 분개할 시간이 없었다.    

가카께서는 9시에 땡하면 KBS 뉴스에 어김없이 등장해서 9시의 스타가 되어있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여러분이 뭐 어쩌라고...? 해 준 것 있습니까?  

정치가들이 내 이런 상황에 기름을 끼얹고 있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인데 어쩌라고....반항심이 들끓고 있었다.

하지만 잠자는  이 지성은 나라를 위해 아무것도 하질 않았다. 내 삶도 쿠데타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리 없는 반역이 시작되고 있었다. 느낌은 있었지만 증거가 없어서 모른 체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이 귀에 들려올 리가 없었다. 그 쪽으론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무관심했다. 

세 녀석들이 좀 크자 번갈아 가며 집안의 물건들을 부수고 있었다. 텔레비전이고 전축이고 심지어 피아노 의자까지 남아 나는 물건이 없다. 일단 망가트린 후에 사용하였다. 어쩌다 TV를 보려면 오른 쪽 위에 달려있던 스위치를 찾아내려고 온 집안을 들쑤시고 다녀야 했다. 

화장대나 옷장 밑에 있는 것을 겨우 발견하곤 총채 같은 막대기로 끌어내는 수고를 하지 않으면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을 볼 수가 없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은 왜 그리도 열심히 보았던지....9시 뉴스는 꼭 봐야 한댜는 의무감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사춘기가 시작될 나이도 아닌데 나는 세상을 삐딱하게 보고 있었다. 그렇고 그런 세상에, 그렇고 그런 내 인생이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 80이 되어가는 나이에 뒤돌아보니 케네디도 몰랐던 그 여대생만 무식했던 게 아니고 설대 출신도 별 볼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제동이 우리나란 많이 배운 사람들 특히 설대 출신들이 망치고 있다. 진보 쪽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어대는 모습을 화면에서 보며 나도 웃었다.

설대 법대 출신이 얼마나 성깔이 개 같은지는 난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4살 위인 오빠가 나하고 놀아준 기억은 한 조각도 없다. 중학교 때 아버지 명에 의해서 오빠가 영어를 가르쳐 주었다. 

Too....to 형식이라는 이디엄을 손가락으로 가르치며  too young to kiss 라고 예문을 들었다. 넌 말이야 키스하기엔 너무 어리다. too....to 형식은 무엇무엇 하기엔너무 무엇무엇 하다 라는 뜻이야. 

14살 짜리 여동생한테 괘씸하기 짝이없는 예문이었다.  고작 예문을 하나 들어주고는 너도 예문을 만들어 보라고 했다. 오빠같은 기발한 생각이 나질 않아 우물쭈물하고 있었더니 

이 맹꽁아.....그것도 못해? 

하면서 연필심을 잡고 지우개가 달린 쪽으로 내 머리를 툭툭  때리치던 오빠였다. 

지금 같으면 too bad to brother. 하고 뿜었겠지만 그 땐 그만한 ....순발력이 없어 늘 당하고만 살았다. 연필 지우개로 머리를 맞는 일이 제일 모멸감을 느꼈는데 오빤 그 짓을 멈추지 않았다.

오빤 설대 법과대학을 합격했는데 잘난 척을 잘하고 다른 사람을 무척 멸시했다. 설대 교수들이 왜곡된 사관을 갖고 있었는지 툭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을 엽전이라고 지칭했다. 엽전이 그렇지 뭐....는 입에 달고 살았고 누가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코리안 타임이라고 빈정거렸다. 

그러는 자기는 뭐 엽전이 아닌가. 미국에 가길 잘 했지 한국에 있었더라면 덜 떨어진 검사나 꼰대 판사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직장에서 끼리끼리 모여 조직을 만들고, 끼리끼리 단합해서 돈과 권력과 높은 지위에만 매달려 잔머리 굴리고, 잔머리가 먹히지 않으면 음모를 꾸미고, 음모가 먹히지 않으면 모해해서 실적을 쌓고, 남보다 빨리 진급하고 남보다 많은 돈을 버는 데만 신경을 쓰는 그렇고 그런 판, 검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역사를 좋아하는 나는 그런 예를 책에서 수없이 읽었다. 조선 시대에는 공자 맹자를 외우고 시만 잘 지으면 과거 급제를 하였다. 암기만 잘하면 되는 시대였다. 이렇게 해서 묘당에 나간 일부 사대부들 중에는 오만하고 치졸한 인사들이 많았다.....그 이기심과 치졸함이 한 줌의 DNA가 되어 우리 오빠에게 내려온 게 아닌가 싶었다.

고인은 존중을 해야 한다는 우리의 미풍양식을 모르는 바는 아니 지만 수시로 으스대던 오빠에 대해서 한 줌의 그리움도 없다는 것이 내 불행의 시초였는지도 모르겠다.      

현대의 전문적인 용어로는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라는 정당 정치는 선과 악이라는 흑백논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가카의 고스톱이 유행되었다.

“니 것도 내 끼고 내 것도 내 끼다.”


이런 와중에서도 아이들은 커가고 새 집을 지었다. 집을 짓는 동안에는 식구들 6명이 흑석동 친정에서 보냈다. 몇 달 동안 옹색하게 살다가 집이 완공되자 이사를 했다. 

아들 세 놈과 사촌 여동생을 데리고 새 집에서 혼자 아이들을 돌보았다.

참으로 예쁘게 지은 집이었다. 아담한 이층집에 잔디밭까지 만들었다. 벚꽃이며 앵두 나무며...나무들을 많이 심었다. 강아지도 한 마리 키웠다. 이름을 해피라고 지었다. 이사를 하고 알콩달콩하게 살 줄 알았다. 

헌데 생활비를 주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냥 홀연히 집을 떠나 버린 것이다. 

지겨워서 피아노 레슨도 안 하던 무렵이라 갖고 있던 푼 돈마저 씨가 말랐다. 

긴급할 때 타고 나갈 버스비만은 꼭 쥐고 있었다. 쌀독이 비면 친정 어머니에게 달려갈 비용이었다. 어떻든 아이들을 굶기지는 않았다. 그런 복잡한 심경을 안고 나는 밤을 새며 앞으로 살아갈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KBS TV에서 의학 드라마 “소망”의 소재를 구한다는 자막이 나왔다. 나는 소재를 주기보담 내가 한 편을 써내려고 마음을 먹었다. 드라마 쓰는 형식도 몰랐지만 시나리오를 쓰던 경험이 있어서 드라마와는 4촌 쯤 되어서 쓰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이미 방송이 되고 있으니까 전체적인 상황과 캐릭터는 연구할 필요가 없어서 스토리와 구성을 하고는 짬짬이 쓰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내가 멘탈이 그렇게 강인한지는 몰랐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비참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갑자기 생활비가 없기 때문에 외상으로 살고 먹고 사는 문제가 달려있었다. 언제까지 친정에 5개나 되는 숟가락을 얹을 수는 없었다.

어머니가 집을 팔고 친정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염치도 없거니와 아담한 정원이 있는 그 집을 너무 사랑했기에 망설여졌다.

전화비가 밀리고 하루 20개씩 때야 하는 연탄 보일러여서 연탄 소모가 장난이 아니었다. 외상으로 100개씩 들여와도 닷새면 떨어졌다. 게다가 집이 부분 고장이 나서 안방만 미적지근하고 아이들 방은 냉골이 되었다. 

작은 아이들과 여동생은 안방에서 같이 자고 큰 아들은 겨우내 냉방에서 잠을 잤다. 그 애가 한탄을 했다. 

엄마, 초가집이라도 좋으니까 따듯한 방에서 자고 싶어요.....

때마침 중동에서 이스라엘이 6일 전쟁이 일의켰다. 세계 경제는 얼어붙었고 대한민국도 몸살을 앓고 있었다. 집을 팔려고 복덕방 수십개에 내 놓았지만 몇 개월이나 팔리지 않았다. 

결국 반에 반 값도 못 받고 거저 주다시피 팔고는 아이들 넷을 데리고 친정으로 기어 들어갔다.                     

밀린 세금 내고 밀린 백색 전화값도 내고 외상값 갚고 내가 들어갈 아버지 빌딩의 3층 전세금을 주고, 사무실을 리모델링을 하고 나니까 또다시 거의 털털이가 되었다. 

방 두 개와 좁은 거실 하나를 만들어 우리 6식구가 기거하고 밥은 4층 어머니한테 얻어먹었다. 그 초라한 이사를 설명할 수가 없어 애들을 위로하기 위해 막 나오기 시작한 컬러 TV를 사고는 다시 무일푼이 되었다.     

원고를 다 쓰고 나자 소망이 언제 어디서 녹화하는지 KBS 교환대에 전화로 자세히 물었다. 본관 제4 스튜디오를 찾아갔다. 난생 처음 들어가 보는 방송사였다

부조(부조정실)는 2층에 있었다.

소망을 녹화하고 있던 중견 최감독님을 찾았다. 어느 배우가 NG를 하자 그 틈을 비집고 최감독님 앞으로 가서 사연을 말하자 그는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차 한잔을 마시며 기다렸다.

방송사 휴게실은 아주 넓고 사람들이 와글거렸다.

꽤 기다린 끝에 그가 왔다. 

김 아무개를 아시죠? 

그는 인상 좋은 눈으로 웃으며 끄덕였다.

대학 때 아무개하고 명동 국립극장에서 감독님을 만나 뵌 적이 있어요.

첫 인사를 텄다. 그는 날 기억하지 못했다. 나에게 처음 한 말은 무슨 이야기냐며 내어 민 원고지를 보며 물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감독이 작가를 만나면 첫 번째 하는 말이 무슨 이야기 없어요? 하는 질문이었다 

디스크에 걸린 청소미화원이 병원 응급실에 갔는데 그를 고쳐주는 신경외과 의사와 여자 인턴의 사랑 이야기라고 간단히 말했다. 

읽어 볼테니 전화 번호를 달라고 했다. 녹화 중이라 그런지 불친절하진 않았지만 사무적이서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햇볕 바른 휴게실 창가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한가하게 웃고 떠들고 있는 방송가 사람들을 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며 반드시 여기에 다시 오겠다고 혼자 다짐을 했다.

어느 날 밤늦은 시각에 그 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 작품으로 야외 촬영을 하고 있는데 물어볼 것이 있으니 집에 가 있으라고 했다. 번개 불에 콩 구어 먹는다는 말이 생각이 났다. 뭔가 좀 더 근사한 예고편이 있고 가슴 설렘이 있고 대본에 대한 비평도 있고..,,수많은 절차와 행사를 밟고 나서 녹화가 되는 줄 알았다. 

우리 집에서 택시로 10분 거리였다. 부인이 상냥하게 맞아주었다.

감독님은 늦게야 왔다. 대본을 주며 손도 씻지 않고 주방 식탁에 안내를 했다. 대본엔 내 이름과 감독 이름 제목이 작게 써 있었다. 마치 늘상 있는 일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식탁에 마주 앉았고 감독님이 처음부터 읽으며 모르는 곳을 물었다.  의학 드라마이기 때문에 모르는 전문 용어가 많이 나왔다. 

내가 취재했던 의사 선생님처럼 흉내를 내며 디스크라는 병에 대해서 아주 상냥하고 자세히 설명을 했다. 

리딩이 끝나고 어떤 한 씬을 이만저만 하게 고치면 좋겠다며 내일 아침에 전화하겠으니 그때 불러 달라고 했다. 집에 돌아가서 한 씬을 고치고 새벽에 전화로 불러 주었다.  

그 주 일요일 아침에 방송이 되었다. 내 이름이 화면에 찍혀져 올라왔다. 부제는 “서원”이었다. 수녀가 되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엄숙하게 약속하는 것을 서원이라고 한다.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 감독님이 전화를 주었다.

드라마가 홈런은 못되어도 3루타 쯤은 되겠어. 박 리미씨 큰 작가가 될거야....

울컥은 안 했지만 처음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뻤다. 내 작품이 방송되었다는 사실이 어리둥절하고 거짓말 같았다. 어머니는 잔칫날 같은 모습이었고 아이들도 신나했다. 

서원은 결핵 요양원 인턴 의사 선생이 달이 밝은 날 장미원 옆에서 들려주던 첫사랑 그 이야기 였다. 

희망이 생겼다. 원고료가 얼마인지 알아내었다. 어떻게 알아내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머니에게 갚을 게요....하고 당당히 손을 벌려 아이들 초, 중학교 학비며 내 용돈을 가불 받았다. 

솔까..., 부모님한테 돈 빌리고 갚은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라고 하고 싶다. 게다가 외동 딸이어서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이렇게 해서 나의 첫 사막(沙漠)의 카덴짜는 연주되기 시작했다.     

한동안 MBC에서 “호랑이 선생님”이니 “박순경”을 쓰다가 연출자가 바뀌고 일이 없어지자 다시 어린이 드라마를 쓰려고 KBS로 돌아왔다. “눈이 큰 아이” 라는 어린이 연속극을 썼다. 연속극이 끝나자 이것저것 쓰는 데 평판이나 시청률이 나쁘진 않았나 보다

일일 연속극 청탁이 정식으로 들어왔다. 시놉시스라는 말을 처음으로 들었다.

연출자가 대신 써준 기획서가 통과되고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열심히 썼고 감독은 캐스팅을 하고 실내 세트를 미술 팀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드라마 세트 설계도면이 나왔다. 첫 녹화일도 결정이 되었는데 여주인공이 아직 캐스팅 되지가 않았다.

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여분의 대본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계속 쓰기만 했다.

방송 일자도 결정이 되었다. 

갑자기 날벼락이 떨어졌다.

내 드라마의 작가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길로틴I(guillotine)으로 목이 잘린 마리토와네트 프랑스 왕비처럼 하루 아침에 댕겅 목아지가 잘리고 말았다. 

나 대신 쓸 작가는 라디오의 “xx 부인 oo 부인”이라는 10분짜리 콩뜨를 쓰고있는 아무개 선생이라는 것이다. 내 작품을 왜 그 사람이어야 써야 하느냐고 물었다. 감독이 설명해 주었다.

그 분이 쓰는 라디오 꽁트를 가카께서 들으시는데 너무도 재미있고 마음에 들어 작가를 청와대까지 초대를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 종류의 유쾌하고 행복한 이야기를 TV 드라마에도 취급해서 모든 국민이 다 함께 유쾌하고 행복해지면 좋지 않겠느냐고 하셨단다. 

나머지는 방송사 높은 분들께서 알아 챙겨드린 것 뿐이다.

국가여....!!  국가가 나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인가....

나하고는 상관이 전혀 없을 줄 알았던 가카께서 내 전정을 가로막았다.

 

중학교 때 등교길이었던 경무대 사람과 관련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아무리 총칼로 나라를 빼앗고, 국영방송이라고는 해도 가카께서 하실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도 있는 법이다.  

가카께서 아침부터 라디오 꽁뜨나 들으시고 방송사의 일개 프로그램까지 감 놔라 배 놔라 지휘봉을 휘두르시다니 자상하신 건가 무식하신 건가 쪼잔하신 건가. 

졌다....뭐....!!! 이를 악물었다. 

沙漠의 카덴짜.....대통령은, 당치도 않은 식으로 나를 슬프게 히고 외롭게 했다. 

내 사적인 이야기니 접어두자.

그러나 국가는 이래서 안 된다...

혼자 된 여자가 새끼들 데리고 살겠다고 피를 찍으면서 쓴 이야기를 다른 사람 이름으로 방송되게 만든다고라......


국가는 이래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만 썼다.

이제 진짜 국가는 이런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써야겠다.

아직 쓸 이야기가 몇 회 더 있다.                                    

                                                                                                                                   202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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