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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리미 Jul 13. 2021

4. 사막(沙漠)의 카덴짜(4)

 沙漠의 카덴짜(4)     

손녀 하은이가 2월 중학교  졸업식을 끝내자 곧 이사를 했다. 

작년 가을에 땅을 사고 봄부터 계획하고 늦가을에 집을 짓기 시작해서 올해 2월 초에 집이 완공 되었다. 

작년 12월 1일에 퇴원을 하고 석 달 만에 이사를 하니까 지인들은 내가 몸이 허약해져서 휴양을 위해 시골로 이주한 것이려니 묻지도 않고 지레 짐작들을 한다.  

대지가 100여평 정도인데도 건평은 20평 밖에 지을 수가 없어서 이층으로 올렸다. 오목조목 입체감이 있으면서도 아담한 양옥이다. 벽 색깔은 너무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은 청록색인데 크고 작은 창틀이 하얘서 산뜻해 보인다.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 눈엔 촌스럽지가 않고 제법 세련돼 보인다. 마음에 들었다.


옆집과 사이는 두 사람이 같이 지나갈 정도의 골목길이 있다. 나중에 옆집이 나무로 벽을 만들어 현관에서 정원으로 나가는 골목길은 혼자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 되었다. 그 골목을 나서면 6, 70 평은 되어 보이는 정원터가 나왔다. 

건축 뒤끝이라 잡초며 돌덩어리며 나무 조각들이 잡초가 스산하게 널려있고 땅은 질척거리고 지저분했다. 마당 앞 끝머리에  2m 쯤 아래로 논이 넓게 있어서 시야가 확 트였다. 추수가 끝나고 겨우내 방치되어 있던 논은 덜 깎은 서양 남자 민대가리처럼 누렇게 들떠 있었다. 

총체적으로 황량했다. 

이사 한 후 1주년 되던 해, 첫해 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땅은 모래 없는 사막 같다. 말로만 듣던 북 러시아의 녹다만 츤드라 지대 같기도 하다. 이 땅을 어떻게 가꾸어 아름답게 꾸밀 수 있을까...황무지 같이 쓸쓸한 모습이지만 상상의 여지가 있어서 심란한 중에도 즐거웠다. 논두렁 너머에는 유치원이며 교회 건물이며 작은 시골 마을이 보였고 세종시와 사이를  터널로 뚫게 되어있다는 낮으막한 산이 보였다. 

산 골짜기 밑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우리 집 건너편에 19세기 말에나 지었음직한 예전에는 초가집이었음에 틀림없는 집에는 초가 이엉을 벗겨 버리고 함석으로 지붕을 만들었다  지붕은 유난히 해맑은 파란색이다. 게다가 빨간색 끝동처리가 되어있다. 가운데 본채고 양쪽으로 작으마한 별채가 두 채 더 있는데 여기도 파란 지붕과 빨간 끝동으로 되어있어서 경치에는 다소 옥에 티처럼 보였지만 아무도 불평을 말하는 식구는 없었다. 

유신 시절에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를 확성기에 틀어놓고 하루종일 불러대던 새마을 운동 시절에 초가집은 너무 없어보인다고 전부 벗겨내고 함석으로 바꾸고 지붕을 삼원색으로 화려하게 갈아치웠던 시절의 유물이지 싶어 나 혼자 몰래 웃었다. 험데 별로 있어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아들의 대학 여자 동창생 내외가 꼬마를 데리고 놀러 왔다. 다실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데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여자 동창생이 말했다.


산도 있고 경치가 좋다. 청와대도 보이고...


우리 가족은 밥을 먹다가 폭소가 터졌다. 별로 웃기려고 한 말도 아닌데 너무도 정곡을 찌른 표현이라 웃음이 터졌나 보다. 논두렁 너머 파란 지붕을 청와대로 불러주니까 얼마나 고마운가. 그 후부터는 건너다보이니까 볼 수 밖에 없는 그 집에 대해서 오는 사람들에게 청와대가 보인다고 자랑을 했고 야릇한 애정을 갖게 되었다. 마을 뒤쪽에는 북악산보다 얕지만 산에 둘러 싸여있어 시골의 겨울 풍경이 포실하고 정답다. 


 내 방안은 아담했지만 50년 넘게 쌓아온 안방 세간을 집어넣기에 너무 좁았다. 전부 버리고 가야 한다고 강조하던 며느리의 주장에 어쩔 수 없이 다 버리고 왔지만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었다.

전에 살던 집 서재에는 기억자로 꺾인 두 면의 벽에 6개의 책장이 있었다. 그득 꽂혀 있던 책들 중 절반 이상은 막내 아들네로 보냈다. 그리고도 일부 버릴 책과 갖고 갈 자질구레한 책을 방바닥에 특별히구분해 놓았다. 

내가 하루 먼저 이사를 온 때문에 버려야 할 책과 버리지 말아야 할 책을 바꾸어 갖고 왔다는 것을 알았다. 꼭 있어야 할 오래된 역사적인 책들이 사라지고 없어도 될 책들이 있는 것을 보고는 어이가 없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책은 사서 읽었기 때문에 책이 정말 많았고 나의 인생을 보는 것 같아서 늘 뿌듯했던 서가였다. 10분지 1만 가져온 책들 중에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 책들은 동생 방에다 보냈다. 더 이상  버리고 싶지 않았다.

책장 선반은 핸드 메이드로 했다. 맨 밑에 벽돌 석 장 씩 양쪽에 놓고 두꺼운 선반을 놓았다. 그렇게 삼층으로 선반을 쌓고 책들을 정리해서 꽂아 넣었다. 갖고 온 책은 창문 밑 선반 석단이 고작이었다. 많은 돈이 들어있는 통장 하나를 잃어버린 것만큼이나 속이 아리고 속상하고 아쉬었다.

요즘 “신박한 정리“ 라는 TV 예능 프로를 즐겨 보고 있다. 신박한 이라는 형용사가 우리말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신 애라와 박 나래의 두 성씨로 붙여서 제목을 달았거니 생각하며 보는데 신박하다는 말이 퍽 깔끔한 언어로 익숙하게 다가온다.

정리는 비움에서부터 나온다. 정리해야만 보인다. 이들의 주장이 새로운 철학으로 돋보이기까지 해서 혼자 웃는다. 신박한 팀이 찾아간 집은 언제나 엉망진창이었다. 그 좋은 집과 좋은 가구에 둘려 싸여 정작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옛날 6. 25. 전쟁 때 피난살이 하던 것 이상으로 옹색하게 살고 있었다. 

심지어 짐에 쫓겨 침대에서도 못 자고 구석방 소파에서 자는 어머니도 보았고 5살 짜리 귀한 외아들 방이 창고로 추락하여 거실에서 재우는 모습도 보았다. 사람이 먼저인 가족이 아니고 일상물건이 먼저인 세상에서 살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돈이 흔한 게 탈이다. 갖고 싶고 사고 싶은 것이 기어히 사고 만 죄로 자신들은 가구의 짐덩이가 되어 얹혀사는 꼴이 되고 말았다. 

버릴 것, 나눌 것 다 치워낸 집은 넓고 산뜻해 보였고 아름답게 변신했다. 

신박한 정리를 요청한 사람들은 그 모습에 감격을 했고 심지어 울기까지 했고 아마도 많은 비용이 들었을 것 같았는데도 들인 돈에는 전혀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고마워하고 만족해 했다.

부엌 살림은 많이 처리하고 왔지만 특별히 좋아하고 세월이 박힌 세간은 내가 고집을 부리고 갖고 와서 마루에 놓았다. 문갑은 길게 놓을 수가 없어서 이층장으로 올렸다. 사방탁자는 문갑 좌우로 놓아야 문갑과 함께 위엄이 있는오데 그것도 이층으로 올려 이층 자리가 된 사방탁자와 문갑을 나란히 벌을 세워 놓았다. 

그 맞은 편에 소파라니....동서양이 섞인 살림이 되고 말았다. 좁은 거실에 과히 어설프지는 않고 그런대로 어울렸다.

옷들은 오래되긴 했지만 비싼 털코트까지 버리고 왔는데 좁은 붙박이 장에 다 넣기엔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었다. 그래도 이불이며 옷들을 전부 정리를 끝내었다...내 방 하나 정리하는데도 몇 날 며칠이 걸렸다. 다 정리하고 나니 삭신이 쑤셨다. 

대지 100여 평에는 건평을 20평 준다는 시골 법규 때문에 이층집이 되버리고 말았다. 아들 며느리 손녀는 이층으로 떠밀려 올라갔다. 저희들이 집을 짓고도 이층으로 자진해서 올라간 아이들에게 고마우면서도 불편하고 미안한 마음이다.

내가 이층으로 올라갔으면 딱 좋겠구만 이제 층계를 오르나릴 나이는 아니라는 아이들의 주장으로 그만 일층 안방을 차지하게 되었다. 사실 이층으로 오르내릴 자신이 없긴 없다. 

이제 나도 신박하게 정리된 내방의 오래된 물건처럼 정리되어야 할 존재라는 느낌이다.

정리된 집안을 돌아다 보며 어떻게 아이들의 보탬이 되어줄까. 어떻게 하면 내 스스로  정리되어야 할 물건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궁리를 해보나 떠오르지 않는다

항상 꼭 있어야 할 엄마였기 때문에 아이들의 중심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안방을 차지하고도 꼭 있어야할 존재로 느껴지지 않는 자신이 참으로 감프다. 

감프다라는 말을 요즘 젊은이들이 알아들을까? 나도 시어머니에게 배운 말이다. 


내방과 거실엔 하루 종일 볕이 다양하게 들어 보일러는 켜지 않아도 훈훈했다. 따사한 햇볕이 휑한 마음을 위로해 준다. 남향집을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정남향 집에서 사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닌가.     

마당을 가꾸어야 할 3월이 가고 4, 5월이 되었다. 다른 집들은 작년 가을부터 준비를 했기 때문에 수선화며 튤립이 집집마다 환하게 피어올랐다. 6월이 되자 정원이 온통 장미꽃으로 환생했다.   


우리 옆집에는 정원 조경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 대표님 댁이어서 작년에 이미 시작된 뜨락에 본격적으로 정원을 가꾸고 있었다. 되는대로 꽃이며 나무를 심는 것이 아니라 딱 각을 잡고 일을 하는 듯 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다른 꽃들이 눈부시게 들어찼다. 게다가 장치까지 하고  담을 만들었다. 서로간의 프라이버시 때문이 아니라 한창 개구장이 나이가 된 어린 댕댕이가 자꾸만 집밖으로 나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주)푸르네 조경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이성현 대표의 집 정원


둘째 아들 내외와 이대표 내외(왼쪽). 코로나가 없던 시절이 그립다. 


며느리가 식물학을 전공한 전문인이다. 가드너인 옆집 대표님과 뜻이 맞아 함께 일을 했는데 이 대표는 정원을 직접 조경하는 분이고 우리 집 전문인은 주로 이론적인 강의를 한다. 그래도 꼬마 정원사들 키우며 정원 일에도 더러 간여를 하여 나는 정원 일은 손 놓고 전문인 처분만 바라고 있었다.  

 5, 6월이 다 가도록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땅은 여전히 질척거리고 잡초는 야속하게도 끈질기게도 비집고 올라와 조금 더 있으면 뱀이 숨어들 것 같아 그거 뽑아내는 일도 수월치가 않았다. 

연못을 만들고 싶은데 설계도면이 없으니 아무 데나 땅을 팔 수도 없었다. 

멋모르고 일찍 사둔 장미꽃 10 그루는 아직도 작은 화분에 끼어서 자라지도 못한다. 남의 집 장미들은 비료를 듬뿍듬뿍 주어서 그런지 벌써 가지치기까지 할 정도로 탐스럽고 화려하게 피어올라 있고 키는 또 얼마나 자라는지 담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첫번째 버전의 연못이다. 연못이라 부르기엔 온갖 이죽거리는 별명이 다 붙었다. 웅덩이, 냥이들의 샘물등등.. 


연못을 파기로 결심하고 있었는데 전문인은 연못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남의 집 정원을 많이 본 결과 연못을 만들었다가도 뭐가 어떻구 저쩌고 성가스러워서 다시 덮어버리는 모습을 많이 봤다며 아주 부정적이었다.

나는 연못을 파 본 경험이 있어서 고집을 부렸다. 전문인은 양보를 했다. 어디다 파는 게 좋겠느냐고 물었다. 좋으실대로 하란다. 별로 내키지 않는 모습이어서 심통이 났다.

심술이 나서 마당 한 가운데다 크고 둥그렇게 파려고 했는데 수돗가 근처에 파야 물을 갈아줄 때 편리하지 않겠느냐는 전문가다운 조언을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수돗가 근처 땅에 타원형으로 구불하게 선을 그어놓고 아들에게 땅을 파달라고 했다. 

새로 만든 광에는 곡갱이며 호미며 삽이며 꽃부삽등 정원도구들이 대충 있었다. 아들이 쉬는 날 땅을 팠다. 가드닝이라는 책에 연못을 만드는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 식대로 쉽고 편하게 비전문가적으로 만들었다. 연못에 물을 넉넉히 부어주고 워터 코인이며 물배추 물옥잠등을 넣었고 핑크색, 검은색 열대어도 몇 마리 사다가 풀어놓았다. 

그래도 뭔가 허전해서 인터넷으로 작은 분수를 하나 신청했다. 배달이 와서 보니 분수가 겨우 10센티 정도였다. 전기로 연결해 물을 올라오게 하니 부뤼셀에 있는 오줌 누는 소년 동상을 보고 애게...하고 웃었던 만큼이나 작고 초라했다. 택배 온 분수도 우리집 연못이 호수처럼 보일 만큼이나 작고 부실했다.  

그 유명한 동상이 딱 세 살 박이 애기 만큼 작았고 물줄기도 애기 오줌발 보담 더 빈약했다.. 연못 가운데서 치솟아 오를 거라고 상상했던 오줌발이 실오라기 같아서 배꼽을 쥐고 깔갈거리고는 설치하자마자 철거했다. 돈 주고 산건데 아주 철거하기도 아까워서  잔물결이나 일으키라고 구석애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 역할은 꽤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작은 연못에 24시간 작은 물결을 이르키는 핸드 메이드 연못은 우리집 뿐이리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IQ가 높고 머리가 좋다는 평은 언제부터인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 이유가 여러가지 있다는 심중이 있지만 그 중에도 배고픈 거 못 참고  더딘 거 못 참고 불편한 거 못 참는 성질머리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다른 시대까지는 몰라도 조선 시대 500년 동안도 민주주의 못지 않게 빈부차이가 극심하던 시대였다. 정 도전이 젱=이 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울 때만도 정전제도를 착실하게 일구어 농민들이 하얀 쌀밥을 먹게 되었다고 해서  임금이 된 이 성계의 이자를 달아 하얀 쌀밥을 이밥이라고 불ㅅ렀단다 

세월이 많이 흐르자 균전제 뿐만 아니라 정도전이가 세웠던 사림(士林)들이 점점 욕심을 부리고 권력을 탐하게 되어 나라가 윗대가리부터 썩어내리기 시작했다. 양반의 행패에 이골이 난 중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상인이 되어 부상이 많아졌다. 여기서 다시 검언 유착이 아니라 정상 모리배들이 생겨났다. 양쪽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은 농민이며 농토없는 논조차 없는 상민들은 고리를 만들고 짐승을 죽여 파는 백정이 되며 8대 하천이 생겨 사람 대우를 못 받았다.

농민과 하천들은 검언유착이 아니라 정상 모리배들 양쪽에서 피를 빨리고 살을 뜯겼다. 그래도 살아야만 했다. 살림은 세금으로 쇠솥이며 놋 숟가락가지 빼았겼다. 

없는게 많아졌다. 없는거 채울 돈도 없었다. 그래도 살아야 하질 않는가.

베고픈 거 못 참는 백성들은 살 대신해서 먹을 것이 없을가 머리를 굴렸다.

쇠솥이 없으면 없으면 양은으로 만들면 되지 않을까.

꼭 구리 수저 은 수저가 아니어도 다른 것으로도 먹을 수 있잖을까.

이렇게 부족한 것을 채우려고 끊임없이 머리를 굴렸다. 

쇠솥 대신에 양은 솥이 나오고 구리 수저에서 나무 수저가 되었다. 쌀밥이 없으면 땅속에서 지천으로 올라오는 풀을 뜯어 싸래기 섞어 먹는 법을 고안해 내었다. 소나무의 껍질도 벗겨서 먹어치우며 연명했던 사람들은 먹을 수만 있다면 살아나갈 수만 있다면 뭐든 만들어내고 뭐든 응용을ㅇ 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요리 특히 야채 요리가 다양하다. 서양 사람들이 고사리 나물을 먹을 줄까? 그게 얼마나 시싸고 마잇는 음식인지 알 턱이 없다.  세게적으로 유명하게 된 인삼도 산골 응달에 피어나던 성가스러운 뿌리에 불과했으리라.

인구의 1%도 안되었던 왕족과 10도 될까

 말까한 양반에들을 빼고는 90%가 힘없고 돈없는 백성들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먹고 살며 무슨 짓을 해서 명줄을 이어내려올 수가 있었을까

포기를 모르는 끈질긴 생명력과 잘돌아가는 머리로 삶의 도구를 만들어내었던 창의력과 잠시도쉬지 않았던 부지런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연못 주변엔 꽃도 심었다. 전체적인 설계도를 모르기 때문에 비싼 꽃은 사지 못하고 교회 마당에서 사모님이 파주신 꽃들을 심었고 돈 안 드는 제철 꽃들을 사다가 연못가에 빙 둘러 심었다. 

남천이며 다래, 수국, 라일락등 작은 나무 몇 그루를 심어놓았다. 씨크라멘이며 카랑코에 등 알록달록 귀여운 꽃들을 둘렀다. 밖으로 나가는 골목길엔 내가 좋아하는 채송화도 잔뜩 심었다. 

그래도 허전해서 아직 개간되지 않은 벌판에서 억새며 갈대를 몇 그루 뽑아다가 적당한 곳에 심었다. 이웃집에서 나누어 준 바늘꽃을 자금자금 가위로 짤라 여기저기 꽂아 놓고 연못가에도 심었다.      

차고에서부터 현관까지 좁은 골목길에는 태양등도 묻어놓아 밤이면 길 양쪽으로 불이 들어오게 하고 두 개는 연못에도 꼽았기 때문에 해가지면 즉시 불이 켜져서 연못을 비춰 준다.

초라한 정원 모습에 내가 하도 궁시렁 거리니까 전문인이 잔디를 들여왔다.  반평 정도의 잔디밭이다. 넓고 휑한 마당에 돗자리 깔아놓은 격이었다. 잔디를 좋아하는 나는 불만스러웠다. 

전문인은 잔디에 돋은 잡풀 뽑기가 딱 질색이라면서  것도 그만한 것도 버거울 거라고 했다. 

.

“내가 해봐서 아는데” 


그 정도 잡풀 뽑기는 일도 아니다. 내가 다 뽑을거라고 해도 어머니도 힘이 드셔서 못하세요. 아마음 속으로 그랬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거 많이 봐서 아는데요.' 


옥수수도 심고 텃밭까지 만들어 갖은 채소는 다 심었어도 결국 땅의 절반밖에 채워놓지를 못했다. 

정원의 반쪽은 이사올 때 그 모양 그대로 황량한 사막이고, 반쪽은 물도 있고 붕어도 있고 꽃도 나무도 있는 오아시스였다.

사막 쪽은 여전히 땅이 질고 잡초가 솟아났다. 공교롭게도 사막과 오아시스의 딱 중간지점에 장미꽃 두어 송이가 먼저 고개를 내밀었다. 그래서 나는 하루 종일 찬송가를 흥얼거리며 히히거렸다.

“황무지에 장미꽃 같이 피는 것을 볼 때에....” 지겹게 흥얼거리며 전문인을 쿡쿡 찔러 댔지만 그 정도로 신경을 쓸 성격이 아니었다. 


도대체 설계도는 언제 끝나느냐고.....???

빨리 정원 공사를 시작하라고....!!!!!      

이제 와서 말하는 것이지만 정원은 11월도 중순이나 돼서야 시공을 시작했다. 옆집 대표님과 같이 일하는 일류 정원사들 7,8명이 들이닥치고 질 좋은 흙과 비료가 한 트럭 씩 들여와서 빈터에 쏟아놓아 내 코를 납작하게 했다.

어허 전문인은 다 계획이 있었구나.....!!  

설계도면을 사방 벽에 붙여놓고 정원사들은 일을 분담해서 척척 잘도 해내었다. 질척거리던 땅에 질 좋은 흙과 퇴비를 그득그득 섞어 부어 다듬어놓았다. 직사각형 돌을 십자로 깔아 땅을 기하학적으로 구분했다. 

마루 앞에 홀딩 도어를 설치해서 회의실 겸 다실로 만들어놓은 정면 앞에 반 평짜리 잔디를 옮겨 심었다. 제자리에 들어서니 손바닥만 하게 작게 보이던 잔디가 알맞아 보였다. 

색깔이 다양한 벽돌로 땅에 금을 그었다.

직사각형의 디딤돌은 황무지와 오아시스 갈라졌던 바로 그 자리에 가즈런히 놓아 길을 만들었다. 정원은 네 개의 불럭으로 나뉘었다. 그중의 연못이 한 구역을 담당했다. 대충 심어놓았던 꽃과 나무들도 제 자리를 찾아 다시 앉았다. 그날 저녁 때 또 트럭이 들어왔다. 나무와 꽃들을 산더미같이 실어와 부어놓고 간다.

길가 주차장에도 반을 갈라 나무와 듣보잡 식물들을 심었다. 아주 뺵빽이 심었다. 내 한을 풀어주려는 듯이. 세 개나 만든 직사각형 평상도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몇 달을 목을 매고 기다리던 일이 하루에 끝을 내었다. 완성된 정원의 윤곽을 보며 얼마나 흐뭇해서...과연 전문인이 다르긴 다르구나 한 수 접어놓았다.

“황무지의 장미꽃같이....”는 이제 그만 흥얼거리기로 했다.

 이번엔 연못이 초라해 보였다. 열대어들이 살고 있었지만 겨울이 곧 닥치니 집안 어항에 옮겨 놓아야 한다. 꽃도 심을 수가 없다. 전문인이 구근을 심어놓았다고 한다. 어디다 심은지는 보지 못했다..

사막(沙漠)같던 내 인생도 이제 사막(四莫)의 휘장이 열렸다. 나에게 유일하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글 쓰는 재능이다. 일생을 카덴짜를 연주하듯 전력을 다 하며살았다. 드라마 절필을 결심했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는 내 인생을 반추해보고 싶다. 열심히 기록하자. 독백이어도 좋다. 

아름답게 다시 피어날 정원에서 마지막 카덴짜를 연주하고 싶다.         

                                                                                                    2020.   2월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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