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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리미 Jul 28. 2021

Rosarian Village(1)

장미피는 마을(1)

 6)  Rosarian Village(1)     

로자리언 빌리지 라는 말은 장미피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자연스럽고 멋스럽게 생긴 나무를 다듬어 세운 입 갑판이 마을 입구에 있다. 기와로 빙 둘러 장식하고 장미 몇 그루를 심었다. “장미피는 마을”이라 써있고 우린 줄여서 장미마을이라고 부른다.

이태리 장화 같이 생긴 표지목. 보면 볼 수록 독특하다. 

우리 집은 장미가 그리 많지가 않다. 식물학 박사 며느리도 그렇지만 나도 장미보담 야생화나 다른 꽃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열 그루 심었지만 장미 마을이라는 이름에는 걸맞지 않다. 

이 동네는 최하가 집집이 50그루 이상은 심었다. 

우리도 나중에 5그루 더 심었는데 표가 안 나도 너무 안 나서 동네와 균형이 안 된다. 

다른 집들 장미가 너무도 화려하게 피어나니까 장미와 들꽃과의 경쟁이란 애초에 지고 들어가는 게임이다. 

경쟁의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의미로 많이 더 심어야 할 것 같다.

우리집이 보이는 옆집의 사잇길. 옆집은 장미의 성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마을을 대표 하는 장미궁전이다. 

전문가가 아닌 나는 벽이며 울타리며 파골로까지 만들고 온통 심어대는 옆집 앞집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다. 전문가는 전문인 다운 안목과 고집이 있지만 나는 비 전문인의 취미가 있다.

우리집 전문인이 일 때문에 하루종일 나가는 날을 택해서 몇 그루 더 심어야지.. 겨우내 헐벗은 정원을 바라보며 장미를 더 심어야 할 곳과 내가 좋아하는 도라지 꽃밭이며 나팔꽃 같은 야생화 수준을 어디에 심을지 연구하며 혼자 봄 꿈을 꾸고 있었다. 짬뽕이나 섞어 찌개 처럼은 만들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사실 말이지 피어나는 장미꽃을 보면 장미꽃 싫어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좀 있다. 나를 포함해서 좀 특이 체질의 성격이거나 사연이 있어서 그렇지 누가 감히 장미를 싫어한다고 말할 수 있으랴....

전지현이 별로 이쁜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가 큰 손녀에게 항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

할머닌 어떻게 전지현을 안 이쁘다고 말할 수 있어요? 누가 감히 전지현을 안 이쁘다고 말할 수 있으랴...아마 그런 심정이었던 모양이다. 손녀가 맞는 말이고 내가 특이한 것이 옳은 주장이다.

일산의 호수공원 장미 페스티벌과는 경우가 다르지만 고작 대여섯 가구에 불과한 장미 향연치고는 너무도 황홀하고 아름답다니까.


나는 전에 아파트의 1층 20평 땅에 거의 장미로 도배를 해본 경험이 있다.

별로 넓지 않은 마당이지만 아파트의 상당히 긴 난간에도 각종 줄장미를 심었으니까.  키울 줄을 몰라 장미를 많이 말라 죽인데다가 왜 그리도 병이 많이 드는지.....

잎사귀에 검은 반점이 생기는 병이 한 번 시작되면 나무 한 그루는 물론이고 다른 꽃에도 번지기 때문에 아침마다 그걸 잘라내는 일을 하다가 그만 졌다하고 손을 들어버린 경험이 있다. 

헌데 이웃집의 장미를 보니까 그 댁 장미도 그렇게 반점이 돋은 장미가 많았다. 그냥 내버려 두는 모양이다. 내가 지나가다가 더러 가위로 싹둑싹둑 자르지만 그 댁에서는 모른다.  

2020년 한 여름 경험해 보니까 반점이 잘 드는 품종이 있고 전혀 안 드는 품종도 있다. 올핸 그걸 참고해서 반점이 잘 안 드는 장미를 선택해서 심으려고 한다.

게다가 장미는 피어날 적에는 너무도 예쁘지만 시들기 시작하면 환멸을 느낄 만큼 노추가 심하다. 그냥 시드는 정도면 하는 수가 없지만 꽃 이파리가 있는 대로 쩍 벌어져서 도무지 감출 줄을 모른다.

잉그릿드 버그만이라는 영국 배우가 있었는데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라는 영화에서 너무도 청초한 아름다움에 숨이 멈출 정도였는데 하필 그 배우의 늙은 후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어쩜 그리도 추하게 되었는지..그 때의 실망감이 잊혀지질 않았다.  헌데 장미가 딱 그런 꼴이었다.

그 때부터 시들기 시작만 해도 싹둑싹둑 대가리를 잘라내는 못된 버릇이 생겼다. 그래서 장미가 싫다...하는 잠재의식을 갖게 되었지만 막상 예쁘게 피어난 모습을 보니 살아졌던 애정이 다시 솟아났다.  


사실 나는 특별히 정원과 장미에 대한 재미있는 추억이 많다.

내가 다니던 중 고등 대학교가 6.25 전쟁을 방금 치르고 난 학교라는 생각이 전혀 없을 정도로  꽃과 나무와 잔디로 가득한 곳이었다. 

학창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은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다른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26살에 큰 아들 첫돌을 치루고 쓰러지고 말았다. 손님을 100여명 넘게 치루고 나서 쓰러진 것이다. 그 전부터 기침이 심했고 기운이 없었는데 이를 악물고 치룬 잔치였다. 아기가 10개월 넘을 때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차 잔에 부딪는 티스푼 소리에 깜짝 깜짝 놀라며 잠을 깨는 아기었다. 

10개월 내내 잠을 자지 못하고 모유를 먹이기까지 해서 45키로 하던 체중이 39키로 까지 내려갔다. 그런 중에도 새색시로서 뭔가 뽐내고 싶어 요리책을 보고 많은 메뉴를 골라 신식요리를 해내었다.

 손님이 100여 명이 넘었다. 이렇게 많을 줄 몰랐다. 대부분 시아버님 친구분이 많았지만 남녀 친척도 많았다. 그래도 음식이 모자라지 않았으니 얼마나 많이 해내었는지 짐작도 못 할 것이다.

마침 “도우미”도 나가고 없는 막간이었다. 요리부터 설거지까지 나 혼자 해냈다. 

시댁 식구들 중에 누군가가 도와줄 줄 알고 겁 없이 했다.

아이그 야 야....우째 그리 말랐노....

올케 왜 이렇게 말랐어. 너무 말랐다.....

인사는 그렇게 하면서도 설겆이라도 해줄까...하는 시댁 아낙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래서 시짜가 붙은 사람들은 무조건 싫어하는구나....톡톡히 체험했다. 

폐결핵 3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게다가 재발이다. 재발이 되면 약에 내성이 생겨서 대게는 죽는다고 알고 있었다. 친정 엄마가 바로 인천 적십자 결핵 요양원으로 도망을 시켜주었다. 아기는 시어머니 차지가 되었다.     

적십자 결핵 요양원은 인천 연수구 구석진 시골 마을에 있었다. 먼지가 풀풀 나는 밭 사잇길로 한 시간은 들어가야된다. 이층 건물인데 몹시 길었다. 1,2,3 병동이 죽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7월 15일 3복 더위가 시작되는 한 여름이었다. 아기 돌이 지나고 꼭 9일 만의 전격적인 입원이다. 친정 어머니가 따라와 주었다. 이층에 병실이 배당되었다. 병실은  아주 넓었다. 침대와 탁자와 의자 뿐인 참으로 간단 명료한 병실이었다.

그 더위인데 환자한테는 나쁘다고 선풍기도 없었다. 에어컨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할 시대였다.  창밖의 경치가 아름다운 그림 액자 모양 눈길을 끌었다. 

대지가 3만 평이란다. 눈에 보이는 한은 초록색 잔디와 우거진 소나무 숲이다. 

소나무 숲 앞에는 군악대의 대장 같은 아주 품위 있게 서 있는 노송 한 그루가 있었다.  보은에 있는 정 2품 소나무보다 더 아름답고 당당해서 나는 당장 정 1품 벼슬을 하사했다.    

병동과 소나무 숲 중간 쯤 왼 편에는 빨간 사르비아가 십자가 모양으로 붉고 선명하게 불타고 있었다. 적십자를 상징하는 모양이다. 넓은 잔디에서 몇 계단 올라와 병동 앞 까지 또 다른 잔디밭이 바짝 붙어 있다.

잔디밭에는 지름이 3 미터는 됨직한 동그란 장미원이 있었다. 나는 2 병동인데 양쪽 1, 3병동 앞에도 똑같은 장미원이 있다. 저녁 식사를 끝낸 환자들이 장미원 옆 의자에 삼삼오오 모여서 환담을 즐기고 있었다. 저 쪽 아래 정자 밑에도 환자들이 모여 앉아 잡담을 하고 있었다.  짐 푸는 일은 어머니에게 맡기고 병동 밖으로 나가 장미원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예쁜 꽃이 세상에 또 있을까. 잘 관리된 장미원엔 시든 꽃은 한 송이도 없이 모두 싱싱했다. 장미원 안으로 들어가 꽃 한 송이 한 송이를 만졌다. 말로만 듣던 흑장미도 있었다. 흑장미는 까만 줄 알았는데 검붉은 색이다. 

한걸음에 세 병동 장미원을 다 섭렵했다. 알록달록한 여러 가지 색깔이었지만 화려한 빛깔은 아니었다. 모두 참하고 얌전한 개성을 품고도 우아했다. 장미 한 송이송이 마다 향기를 맡았고 쓰다듬어 주었다. 벨벳처럼 부드러운 촉감이다. 이렇게 많고 이렇게 탐스럽고 이렇게 아름다운 장미원은 처음 보았다.

백악관의 로즈 가든에도 이런 장미원이 있을까. 

식사가 끝나면 안정시간이 될 때까지 환자들은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지 냈다. 대화에 싫증나면 잔디밭을 맨발로 산책했다. 소나무 숲길에선 들고 간 슬립퍼를 다시 신고 걸었다. 소나무 향내가 물씬 했다. 어둑 컴컴한 숲길을 지나 호숫가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정1품 소나무가 있고 잔디가 있고 푸른 하늘이 있고 장미원이 있는 세계로 돌아왔다. 

완전 에덴동산에서의 삶이었다. 지옥에서 별안간 천국에서 살고 있었다. 

그 날은 달이 밝은 밤이었다. 검푸르고 맑은 하늘엔 모양 좋은 둥근 달이 떠서 드넓은 정원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장미원 의자엔 어느새 나와 인턴 선생과 둘이 만 남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군의관 3년을 마치고 나온 31살 노총각이었다. 한 명숙 가수의 ‘서른 한 살 노총각님’ 이라는 노래가 유행하던 시절이이었다. 

말을 잘하고 개구쟁이 기질이라 이른 저녁을 먹고 환자들이 모여들면 최전방 군부대에서 군의관으로 있으면서 저지른 장난들을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털어놓았다.

배가 아프다고 온 병졸을 진단해보니 꾀병이었다. 환자의 배에 머큐롬을 시뻘겋게 발라주고 쫓아 보낸 이야기며 저수지에서 수영을 하다가 물뱀을 만나 어마 뜨거라하고 도망치던 이야기며 밭에 들어가서 참외며 수박을 서리하던 이야기며 옥수수 와 감자를 캐어 몰래 구워 먹던 이야기며......

끝없이 털어놓으면 박장대소하고 웃어대곤 했다. 얼굴이 미남하곤 거리가 멀었지만 구수한 생김새 못지않은 말솜씨와 털털한 성미 때문에 환자들이 모두 좋아했다. 

달빛 분위기가 그래서인지 내가 물었는지 잊어버렸지만 그는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술술 풀어주었다. 

아마 내가 졸랐을지도 모른다.  달 밝은 밤 장미원 옆에서 장미 향기를 맡으며 그의 첫사랑 이야기를 들었다.

같은 대학 간호학과 1년 선배였단다. 어느 날 하얀 가운을 입고 운동장 저쪽에서 오는데 그 아우라가 장난 아니었나 보다. 하얀 가운을 입은 모습이 눈부셨다고 한다.  일 년을 사귀었다. 여자는 차분하고 말이 없었다. 약간 신비스러운 타입인 것 같았다. 딱 그림이 떠 올랐다. 

졸업이 가까워진 어느 날 선배는 고백했다. 졸업하면 수녀원으로 들어갈 거라는....

폭탄 같은 선언이었단다. 꿈에도 생각을 못 한 모양이다.  

의대생은 안 된다고 말렸다.  

선배는 수녀가 되어 평생 의료 봉사를 하며 살고 싶다고 했다. 

의사와 간호사 커플이 되어 평생 같이 봉사생활을 하면 더 좋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단다. 한 사람이 봉사하는 것 보담 둘이 봉사하는 것이 더 많이 할 수 있지 않느냐고 호소했다. 선배는 잠시 고민하는 빛이었다. 

의대생은 목숨을 걸고 설득했다. 애원도 했다. 도저히 선배를 보낼 수가 없었단다. 

어느 날 그 선배가 결단을 내리고 말했다. 

사람과의 약속을 어기고 살아도 괴로운데 하느님께 바친 서원을 어길 수는 없다. 

그렇게 일생을 살아갈 수 없다고....

그녀는 끝내 수녀원에 들어가고 말았다.....

충격을 받은 의대생은 다음 해 졸업하자 인턴도 안 하고 바로 군대에 갔고 그래서 3, 8선 부근의 부대에서 장난질을 하며 괴로움을 잊었고 지금 이 병원에서 인턴을 하고 있는 거라고 끝맺음을 했다....

달밤에 함직한 무척 로맨틱한 스토리는 나의 심금을 울렸는가 보다. 그 후에도 둘이서 자주 이야기를 했다. 그가 주로 하고 나는 들어주는 쪽이었다. 혹시나 시집살이 흑역사를  말하게 될까 보아 입을 봉하고 살았다. 

그는 내가 글을 쓰고 있는 것을 자주 보았다. 안정 시간이면 침대에 누워있지 않고 탁자 앞에 앉아 글을 쓰던 것을 회진 때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작가가 되고 싶으냐고 묻기도 했다.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싶다고 실토를 했다.

그때까지는 드라마 작가는 어떻게 되는지 어떻게 쓰는지를 몰라 꿈도 꾸지 않았다. 

그의 첫 사랑 이야기는 몇 년 후에 나의 방송작가 데뷔작이 되었다. 

“서원” 이라는 제목으로 KBS의 메디칼 드라마 “소망”에 채택이 되었다.      

주일 날 아침 교회 갈 준비를 하며 TV를 보고 있었는데 늘 보고 있던 메디칼 드라마 “소망”에서 작품 소재를 구한다는 자막이 흐르고 있었다.

소재 대신에 이왕이면 드라마를 쓰자...인턴 선생의 첫사랑 이야기를 드라마 대본으로 써서 원고를 들고 소망을 녹화하는 날 KBS 본관 스튜디오로 찾아갔다. 최 감독님은 2층 주조에서 녹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잠깐 쉬는 사이에 최 부장님에게 원고를 갖고 왔다는 말을 했다.

지금 녹화중이니 아래층 휴게실에서 기다려달라고 했다.

녹화를 잠시 멈추고 그분이 왔다. 50대 초반 쯤 되는 분이었다. 대학 때 잠깐 뵌 적이 있었는데 나를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무슨 이야기에요?”

  PD가 작가를 보면 첫 번째 묻는 질문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허리를 다친 디스크 환자와 

                                        그를 치료하는 신경외과 의사와 인턴 여의사 사랑이야기 입니다”


간단하게 설명을 했다. 

원고를 읽어보고 연락을 할 테니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 별로 기대는 하고 있지 않았지만 약간 초조하긴 했다.  일주일 후에 최부장이 전화를 했다.   


지금 야외 촬영 하고 있는데 작품에 대해서 물어볼 게 있으니 자기 집으로 가 있으라고 한다. 반포 아파트.... 우리 집에서 10분 거리 이다. 어리둥절했다. 

거두절미 야외 촬영이라니...뭐 번갯불에 콩을 구워먹나...문턱이 높은 곳으로 알고 있었는데 의식의 흐름이지 감정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좋아서 뛰고 발광을 해야 정상이 아닌가?  

부인이 연락을 받았다며 친절하게 맞아준다. 

생각보담 늦게 온 부장님은  대본을 한 권 주며 주방으로 안내했다. 

대본 겉장에는 극본 박 리미, 연출 최아무개 라고 찍혀 있었다. “서원”이라는 제목과 함께.

주방 식탁에 마주 앉아 대본 리딩을 했다. 읽으면서 어려운 의학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물어보시고 나는 취재할 때 의사 선생한테 들은 대로 자세히 설명을 했다. 

취재한 의사 선생의 말투랑 비슷하게....

일주일 후에 방송이 되었다. 방송 끝나고 부장님이 전화를 주셨다. 

     

                                "작품 좋았어요. 홈런은 못 되도 3루타 정도는 되겠어요. 

                                           박 리미씨.... 큰 작가자 될거야”  


감사합니다....내 대답은 상투적이었다.      

그 때까지도 부장님은 내가 처녀인 줄 알고 미스 박 미스 박 했다. 얼마 지난 후에 듣기가 거북해서 좀 신경질 적으로 고백했다. 


  “저 미스 아니에요. 세 아이 엄마에요....!!!”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았다. 이 드라마 '소망'으로 내 '소망'이 날개를 달았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첫 작품이 방송되고 여전히 정신없는 날들이 지나갔다. 부장님이 다음 주까지 작품 하나 더 써오라고 해서였다. 


'무슨 이야기를 쓸까.'


시력을 잃은 사람이 광명을 찾는다는 안과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안과 병원에 취재하러 뛰어다녔다. 구성을 하고 부지런히 쓰기 시작했다.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르고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원고지와 씨름을 했다. 두 번 째 작품도 무난히 패스 되어 두 주일 후에 방송이 된다고 했다.  

그렇게 얼떨결에 거짓말처럼 시작된 방송작가 생활이었다. 

지금의 작가들은 방송작가 교육원에서 최소 2년 이상의 드라마 쓰는 법을 익히고

방송사의 극본 모집에 몇 천대 일의 대결에서 몇 번이나 떨어지며 다시 쓰고 또 쓰고 해서 들어온 작가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비교적 너무 쉽게 꿈결같이 데뷔를 했지만 나 혼자만의 습작 시절은 길었다. 드라마의 사촌 쯤 되는 영화 시나리오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습작해서 신문사 신춘문예에 내고는 했다. 

당선은 못했지만 비평가의 입에 오르내려 신문에 오르락 내리락 했다. 대학 졸업 후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호된 시집살이를 하면서도 나의 습작은 멈추지 않았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습작 원고가 라면 박스로 다섯 개는 되었다. 

영화 시나리오는 당시의 여자로서는 할 일이 못된다는 판단에 손을 떼기로 마음을 먹고 마침 텔레비젼 보급률이 높을 때가 되어서 TV 드라마로 방향을 바꾸었다.,

방송 드라마를 어떻게 쓰는지 몰라서 우선 내 방식대로 써서 보낸 작품이 “서원”이었다. 

그 이후에 드라마 공부를 독학으로 했다. 방송국에서 대본을 가져다가 읽으며 드라마의 언어와 형식을 익혔다. 그 때는 극본을 쓰는 법이라는 책조차 없던 시절이다.

그렇게 해서 25년 여 동안의 작가 생활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은퇴한지 20여년이 넘어가고 있다.     

    초등학교 졸업한지 60여년 정도 되었을까? 셈도 안된다


 로자리언 빌리지는 2021년 1월에 두 가구를 다시 맞는다. 늦여름부터 두 가구를 같이 집을 지었다. 지금은 완성이 되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로자리언 빌리지에서 꽃과 나무를 가꾸며 살고 있다. 노추를 보이지 않고 으젓하게 노년을 보내는 것이 나의 꿈이다. 요즘은 장미도 많이 개발이 되어 시들면 빨리빨리 떨어지도록 개종되었다고 이웃집 대표님이 알려 주었다. . 

밉상으로 시들어가는 장미꽃 머리를 싹둑싹둑 자르지 않고 시들어가는 꽃도 허심탄회하게 볼 수 있도록 마음의 수양이 더욱 필요하다.... 

                                                                                                                                          2020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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