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억한다
그때의 어린 나에게 말을 건네본다
어렸을 적 나는 '말이 없고 지극히 순종적인 아이'였다고 엄마는 말했다. 내가 제일 잘하는 건 얌전히 앉아서 책 읽는 일이었다. 집안 책장에 가득 꽂혀있던 동화책부터 세계 명작, 한국 고전까지 읽으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그런데 어쩌다 만화책에 푹 빠지게 되었을까.
국민(초등) 학교 5학년 때였다. 엄마가 '소년중앙'이라는 어린이 잡지를 생일 선물로 사주었다. 흥미진진한 UFO, 미스터리, 스포츠 선수에 관한 다양한 기사들과 여러 편의 만화가 실려있었다. 그중 순정만화 속 예쁘고 잘생긴 소녀와 소년의 러브(?) 스토리는 그다음 편을 손꼽아 기다리게 했다. 다음 달에 이어 다음 달 잡지를 매번 사달라고 졸랐다.
만화에 빠진 내가 걱정된 건지 아버지가 책을 빼앗았다. 내 눈앞에서 쫙쫙 찢어버렸다. 만화는 해로운 거라며 책을 사준 엄마를 나무랐다. 앞으론 절대 보지 말라고 하셨다. 엄마도 아빠말 명심하라며 그 후 더 이상 잡지를 사주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어디 나뿐이었을까. 만화가 더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어느 날 엄마가 시장 가신 틈을 타서 몰래 집 앞 만홧가게에 갔다. 자리가 없어서 바로 출입문 앞에 앉아서 봐야 했다. 얼른 보고 집에 가 있어야지 했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다가 두어 시간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집에 들어가니 엄마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어디 갔다 왔니?'' 엄마가 물었다.
''친구 집에 갔다 왔어요.'' 나는 쭈뼛거리며 말했다.
엄마는 빗자루와 먼지떨이를 가져와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만화책 보지 말라 했는데 왜 보냐고, 만홧가게에 앉아있는 걸 봤는데 왜 거짓말하냐고.
장을 본 후 집에 돌아가던 엄마가 마침 열린 가게 문틈으로 나를 발견하고는, 집에 가서 내가 오기를 벼르고 있던 것이었다. 순정만화의 단꿈에서 채 깨기도 전에 얼마나 매를 맞았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내게 집을 나가라며 모질게 옷까지 벗겼다. 팬티만 입은 나를 대문 밖으로 내몰고 문을 잠갔다.
우리 집은 큰길에서 옆으로 작게 난 막다른 골목 끝 집이었다. 팬티만 입고 있는 나를 행여 누가 볼까 봐, 이대로 집에서 쫓겨나는 걸까 봐 마냥 겁났다.
그래도 초저녁 어스름에 내 모습이 조금은 가려지는 듯해서 그나마 다행이라 여겼다. 차가울 리 없는 늦여름 바람이건만 매 맞은 곳이 너무도 아프고 시렸다. 두 팔로 맨살을 가린 채 쭈그려 앉아 얼마나 울었을까.
우리 집에 세 들어 살던 아주머니가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를 데리고 들어가 주었다. 나는 엄마가 무섭고도 미웠다. 내 방에 곧장 들어가서 옷을 주워 입고 이불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이 일은 두고두고 가슴 한쪽을 차지하는 두려움과 상처로 남았다.
결혼 후 아이를 낳으면 '나는 절대 때리지 않고 키워야지'하고 다짐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생떼를 부리는 애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화를 주체 못 하고 엉덩이를 때린 적이 있다. 그러고 나면 가슴이 얼마나 저리고 죄책감까지 들던지.
그때마다 어렸을 적 나를 모질게 때리고 쫓아냈던 엄마가 떠올랐다. 나는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엄마도 아팠을까? 그 일이 내게 상처가 되리란 걸 엄마는 알았을까?
얼마 전에야 용기 내어 엄마에게 물어봤다.
''엄마, 나 때리고 옷 벗겨서 팬티 바람으로 쫓아냈던 일 기억나요?''
''그랬었냐? 몰라. 기억 안 난다.''
그래도 가슴속에 묻어두었을 때보다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한 것 만으로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 듯도 하다.
여전히 내 마음속 깊은 곳엔 아픔과 창피함과 두려움에 떨면서 울던 아이가 있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 엄마는 나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때 너무 무섭고 창피했지?
엄마도 분명 마음이 아팠을 거야.
그때의 어린 나에게 말을 건네본다. 내가 나에게 해주는 최고의 위로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