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초등) 학교 때 경필 대회에서 상을 종종 받았기에 글씨 자부심이 생겼던 걸까. 나는 예전부터 공책에 쓰면서 정리하는 걸 좋아했다.
시험 기간이면 외우고 문제 푸는 공부보다 먼저 하는 일이 A4용지에 요점을 적는 것이었다. 쓰면서 공부한다기보다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만이 목적인 양했다. 지저분하다 싶으면 새로운 종이를 꺼내어 처음부터 다시 써나갔다.
중요도에 따라 색색의 볼펜이나 사인펜으로 바꿔가면서 썼다. 그렇게 몇 장을 채우고 나면 시험공부를 다 끝냈다는 듯 바로 잠들곤 했다.
작년 겨울, 동네 도서관 행사 중에 온라인 필사 모임이 있어서 신청했다. 책을 한 권 정하고 열흘 동안 일정 부분을 필사하는 모임이었다. 매일 한 페이지 분량의 필사할 글을 리더가 올렸다.
처음엔 그저 글씨를 잘 쓰는 데에만 주의를 기울였다. 사진을 찍어서 올려야 했기에 글씨에 더욱 정성을 들였다. 어느 날은 네모반듯하게, 어느 날은 동글동글하게 글씨체를 바꿔가며 써보기도 했다. 캘리그래피 하듯 글씨에 멋을 들여 옮겨 적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학생 때 요점정리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억지로 하는 공부라 여겼던 건지 별 감흥이 없었는데. 매일 필사하는 시간이 기다려지고 공부하는 것도 아니건만 머릿속에 쏙쏙 담겼다.
열흘의 일정이 훌쩍 끝난 뒤 아쉬운 마음에 다른 필사 밴드를 찾아 가입했다. 그렇게 시작한 필사가 1년이 넘었다.
매일 오후 3시쯤이면 나는 커피 한 잔과 함께 책상에 앉는다. 준비물은 노트와 펜 그리고 책만 있으면 된다. 책 전체를 필사하지 않고 마음에 와닿거나 깨우치는 구절을 골라 적는다.
한 차례 읽다가 좋은 글귀다 싶으면 되돌아가서 다시 읽은 후 입으로 나지막이 되뇌면서 한 자 한 자 마음에 새기듯 꼭꼭 눌러쓴다. 절로 정독이 될 수밖에 없다.
작가의 유려한 문체에 감탄하며 쓰기도 한다. '따라 적다 보면 닮아지지 않을까, 언젠가 나도 이렇게 멋지게 쓸 수 있겠지'라고 기대도 하면서. 마음을 읽고 헤아려주는 듯한 글귀를 따라 적노라면, 나를 위로하며 내 편이라고 응원해 주는 것 같아서 든든하다.
쓰는 동안에는 괜한 걱정거리도 떠오르지 않는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오롯이 보고 따라 적는 일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자주 있던 두통도 뜸해졌다.
필사란 내가 나에게 해주고픈 말들을 모아 세상에 둘도 없는 나만의 책을 엮는 것이리라.
노트를 빼곡히 채우고 한 장 한 장 페이지가 늘어갈수록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다. 대단한 일이라도 완수한 듯 하루가 보람차다. 또 힘들이지 않고 경제력에도 구애받지 않으면서 나이와 상관없이 즐길 수 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보낸다면 어찌 삶이 근사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필사의 맛에 빠졌다.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맛본 사람은 없다'라는 맛집의 광고 문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