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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이 Nov 03. 2022

서울 할머니

2022년 11월 3일의 기록

하루는 열이 너무 많이 나서 병원에 데려갔더니 글쎄 애를 발가벗겨놓고 걸레 같은 수건을 갖다가 온몸을 벅벅 닦더라. 애는 자지러지게 울고. 발가벗긴 채로 시장을 지나 걸어오다 삑삑이 신발을 사줬더니 아픈 것도 잊고 삑삑이 신발만 보며 걷더라. 삑삑이 신발 한 번 쳐다보고, 나 한 번 쳐다보고.


시장 보고 돌아오는 길은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저 힘들다고 업어달라고 그냥. 힘들다 말도 제대로 못 해서 힘드러워 힘드러워 우는 걸 두고 저만치 가면 또 얼른 쫓아와서 힘드러워 힘드러워.


외할머니가 날 볼 때마다 떠올리고 얘기하고 또 얘기하곤 했던 어릴 적 에피소드. 하도 많이 들어서 그 장면이 기억에 남아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삑삑이 신발을 신고 돌아오던 길, 오르막길 걷기가 싫어서 투정 부리면서도 할머니를 쫓아갔던 일. 집 앞 슈퍼 아이스크림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 두 개를 꺼내 -당연히 계산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에게 하나를 던지며 ‘자! 먹어’ 했던 일.


할머니가 돌아가실 줄 알았더라면, 나는 더 잘했을까? 할머니의 살 빼라는 소리에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할머니가 언젠가는 돌아가실 거란 당연한 사실을 왜 몰랐을까.


예수 믿고 천국 가서 천국에서 모두 만나자. 이게 내 유언이야.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만났을 때 할머니는 웃으면서 말했다. 할머니는 그날 수박을 엄청 많이 먹었다. 그리고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잠든 채 다시 깨어나지 않았다.


나는 성경책을 샀다. 말씀 속에 할머니가 있는 것만 같다. 하나님, 예수님, 우리 할머니 이제 안 아프죠? 우리 할머니 이제 육신의 고통은 벗어버리고 훨훨 날아다니게 해 주세요. 그리고 할머니 많이 보고 싶다고 전해주세요.


할머니가 할머니 손으로 기르던 시절의 어린 나를 평생 그리워했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할머니의 기억을 기억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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