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댁일기
친정집 냉장고엔 늘 시원한 보리차가 있었다. 매번 끓여서 식히고 냉장고에 넣는 게 무척 귀찮은 일이었지만 냉장고에서 꺼내 벌컥벌컥 마시는 시원한 보리차만큼 맛있는 물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친정집에서도 요즘은 물을 끓여 먹지 않는다. 엄마도, 나도 생수를 사다 마신다. 눈 깜짝할 새 쌓이는 플라스틱 페트병을 볼 때면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지만 생수를 주문하고 빈 페트병을 모아 버리는 게 이제는 루틴으로 자리 잡아 버렸다.
날이 더워지니 오랜만에 시원한 보리차가 마시고 싶다. 친정에서는 그냥 냉장고를 열면 있었는데 이제는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다 해야 한다. 일단 물을 끓일 주전자부터 사야 한다. 주전자는 비슷비슷하게 생긴 것 같으면서도 그 종류가 너무나 많았다. 어떤 주전자는 손잡이 모양이 마음에 안 들고, 어떤 주전자는 뚜껑이 너무 작아서 설거지가 걱정되고, 어떤 주전자는 동그란 모양이 미묘하게 못생겼다. 한참을 고르고 고른 끝에 '들통형 주전자'라는 걸 샀다. 주전자의 입구가 냄비처럼 크다. 들통처럼 넓다. 상품 상세페이지에는 그 주전자 안에 오뎅꼬지를 넣어 가득 끓이는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오뎅도 끓여 먹고, 오뎅 국물은 주둥이 부분으로 따라 마실 수도 있단다. 여름엔 보리차를 끓이고 겨울엔 오뎅탕을 해 먹으면 딱이겠다 싶었다.
주전자를 샀으니 물을 담을 물통도 사야 한다. 친정집에서 엄마가 늘 플라스틱 물병을 쓰며 미세 플라스틱 걱정을 했던 게 떠올라 유리 물병을 사기로 했다. '냉장고 유리 물병'이라 검색하니 화려한 꽃무늬가 몸통을 감싼 유리 물병이 잔뜩 나온다. 딱 내 취향이라 검색 범위를 좀 더 좁혀 '레트로 유리 물병'이라고 검색했다. 웬걸 델몬트 주스병이 나온다. 너무 반갑고 귀여워서 용량별로 여러 개 담았다가 아차, 설거지할 생각을 하니 아득하다. 손이 쑥쑥 들어가는 물병을 사기로 했다. 내가 고른 꽃무늬 2개, 신랑이 고른 깔끔한 물병 2개. 관리하기 편하게 뚜껑이 플라스틱인 제품을 살까 하다가 역시 찝찝해서 스댕 제품으로 골랐다.
로켓배송으로 주문한 주전자와 물병이 다음날 퇴근하니 도착해 있다. 주전자도 스댕, 물병 입구도 스댕.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연마제를 제거하는 일. 기름을 먹인 키친타월로 구석구석 문지르니 금방 시커멓다. 귀찮지만 이 부엌의 책임자는 나. 검댕이 묻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닦고 또 닦고, 키친타월을 뭉텅이로 버리며 양심이 또 살짝 아프다. 세제를 듬뿍 묻혀 뜨거운 물로 빡빡 문질러 닦는다. 너무 세게 닦았는지 손에서 피까지 봤다. 물병 입구가 날카로워 거기에 베인 것이다.
손가락을 다치니 집안일하기가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나는 원체 물을 좋아해서 물을 쓰는 집안일(빨래, 화장실 청소, 설거지) 담당이고, 나머지 집 청소와 분리수거, 쓰레기 버리기(특히 음식물)는 신랑 담당이다. 그렇다 보니 손가락의 상처가 더더욱 거슬린다.
하지만 나의 목표는 시원한 보리차. 비장하게 고무장갑을 꺼내어 끼고 설거지를 마친 후 마침내 보리차 끓이기에 성공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냉장고에서 차갑게 식은 보리차부터 한 잔 따라 마셨다.
너무 맛있다.
아줌마로서 한 뼘 성장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