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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이 Jul 21. 2023

그건 나였을지도 몰라

교사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하여

올 초에 내가 저장해 놨던 글의 제목들이다.

이번 학년도부터 학교폭력 업무를 맡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건 작년 2월 초. 소식을 듣고 2월부터 곧바로 사건이 시작 됐다. 엄밀히 말하면 2월은 학년도로 치면 작년이기 때문에 전임자가 처리해야 하지만 어차피 3월로 넘어갈 일, 그냥 내가 하기로 했다. 아직 업무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방학 중에도 출근해 사안 조사를 하고 왜 우리 애한테만 그러냐는 학부모에게 시달리고 경찰과도 몇 번이나 통화하며 사실 확인을 하고 교육청에도 계속 전화해서 절차를 묻고 ... 이건 뭐 내가 교사인지 탐정인지 이럴 거면 내가 변호사를 했지, 참 지랄 같았다.


학교폭력 책임교사 수업지원이라고 해서 교육청에서 수업을 7시간 지원해 주는데 엄밀히 말하면 강사비를 지원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도 결국 내 일이다. 채용 공고를 내고, 평가하고 면접 보고 매달 강사비 지급도 해야 한다. 뭐 아무튼 본격적으로 신학기가 시작되기 전에는 내 수업이 너무 적어서 좀 민망했다. 명색이 교사인데 아이들과 수업하는 시간이 일주일에 10시간 밖에 안된다니 이거 이래도 괜찮은 건가.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3월에만 연달아 학폭이 4건이나 터졌다. 3월 말에는 신혼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가장 행복해야 할 신혼생활이 매일 눈물로 얼룩졌다.


그중 한 건이 지독하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음 사건으로, 또 다음 사건으로 이어졌다. 4월, 이미 접수된 학폭은 6건. 내 정신력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고 친절하게 응대해야겠다는 다짐도 모두 산산이 부서졌다. 주변에서는 ‘친절하게 대하지 말라‘고 했다. 젊은 데다 여자라서 안 그래도 만만히 보는데 응석 다 받아주면 나만 다친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그건 맞는 말이었다.


시험기간이 다가왔고 학폭 업무에 시험 출제에 나는 몹시 지쳐있었다. 시험을 치르지 않는 1학년들을 데리고 외부에 체험학습을 나가는 건으로 1학년부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그 전화가 왔다. 전화를 건 학부모는 일전에 학교에 ‘쳐들어온‘ 전력이 있는 사람으로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상대였다.


학폭 업무를 맡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업무폰을 따로 개통하는 것이었다. 임용에 합격한 지 이제 막 1년이 되었을 때라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앞서 이미 상당히 번아웃에 빠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일과 생활을 분리할 필요가 있었다. 또 기존에 사용하는 폰이 아이폰이었기 때문에 통화 녹음이 되는 핸드폰이 따로 필요하기도 해서였다.


그 학부모가 학교에 ‘쳐들어왔던’ 이유는 내가 전화를 받지 않아서였다. 퇴근 이후에, 주말 저녁에 전화해 놓고 내가 전화를 안 받아서 왔다는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덧붙이자면 당연히, 아침에 출근해서 부재중 전화 확인하자마자 연락한다. 그날도 1교시 수업이 있어 수업 끝나고 몇시쯤 연락 드리겠다고 문자를 남겨 놓은 상태였다.) 선배 교사가 요즘 선생님들은 업무용 폰을 따로 쓰고 있어서 업무 시간 외에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부드럽게 설명하니 내가 매정하단다. 그래 왜 전화하셨냐고 하니 이유도 터무니없었다. 자세한 설명은 할 수 없지만 교육청에서 보낸 문서를 잘못 읽고 오해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럼 교육청에 전화를 했어야지.


아무튼 1학년부 회의 중 그 학부모에게 전화가 왔고 다른 담임 선생님들이 일단 받아보라고 했다. 그때부터 20분, 10분, 5분 간격으로 전화가 오더니 받을 때마다 점점 언성이 높아졌다. 그딴 식으로 일처리를 하냐, 교육청에 신고하겠다, 두고 봐라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나는 멘탈이 터져서 그 자리에서 엉엉 울고 말았고 도저히 학교에 있을 수 없어 그 길로 조퇴를 하고 교직원을 위한 상담센터로 가 상담을 받았다.


그다음 날은 병가를 내고 정신과에 가서 약을 처방받았다. 병원 가는 길에 버스를 탔는데 버스가 급정거를 하자 어떤 할머니가 기사에게 화를 냈다. 너무 무서워서 울음이 나왔다. 그날 저녁엔 남편이 바람 쐬자며 마트를 데리고 가줬는데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 목소리만 들어도 두려워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약을 먹어도 무섬증이 나아지지 않아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병원에 갔지만 먹어야 될 약만 늘어갔다.


결국 그 주는 전부 병가를 내고 학교를 쉬었다. 그다음 주는 현장체험학습 주간이라 학교가 아닌 곳으로 출근을 하니 괜찮을 줄 알았다. 마침 쉬는 날이었던 남편이 체험학습 장소까지 바래다주었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울음이 터져서 걷잡을 수가 없었다. 무서워 무서워 너무 무서워, 길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는 나는 내가 봐도 낯설었다.


결국 학교와 상의해서 한동안 학교를 쉬기로 했다. 결혼식 직전이어서 병가와 특별휴가를 붙여서 2주 동안 학교를 쉬며 약을 먹고 상담을 받았다.


학교에 가야 하는 날이 다가오는 매일 밤이 두려웠고 죽어서 모든 걸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아프게 뛰는 심장을 큰 칼로 찔러 멈춰버리고 싶었다.


내 상황을 알자 모든 걸 던지고 달려와 준 단짝 친구가 있었다. 퇴근 후에 멀리까지 나를 보러 와준 동료들이 있었다. 할 줄도 모르는 쌍욕을 해가며 화를 내는 엄마가, 너무 조심스러워 내게 뭐라 묻지도 못하고 속상해하는 아빠가 있었다. 매일 내 상태를 살피며 돌봐준 남편이 있었다. 내가 죽으면 나는 편해지겠지만 남은 사람들이 너무 괴로울 것 같았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니 상상만으로도 미칠 것 같았다.


오로지 그 생각으로 버텼고, 나는 생존했다.


이른 새벽에 학교에 출근해서 그 선택을 하기까지, 얼마나 괴롭고 외로웠을까.


내가 만약 그런 선택을 했더라면 나도 정신과력이 있으니 우울증을 앓다가 극단적 선택을 한 교사가 되었을까. 21세기 직장인 중에 우울증 없는 사람도 있나. 경찰과 언론 보도에 치가 떨린다.


도저히 쓰지 않고는 버틸 수 없어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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