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은 없다’, 공리주의의 ‘찔레꽃 철학’ 스릴러

by 유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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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모 ybacchus@naver.com] 박찬욱 감독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이경미 감독이 데뷔작 ‘미쓰 홍당무’(2008) 이후 내놓은 ‘비밀은 없다’(2016)는 소포모어 징크스가 그녀에게만큼은 없다는 것을 입증할 수작이다. 한류 스타 손예진과 유작 ‘독전’(2018)에서 신들린 듯한 악역 연기를 보여 준 김주혁의 빌런 캐릭터의 시작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높다.

보수 성향의 늙은 능구렁이 정치인 노재순이 오랫동안 장기 집권해 온 경상도의 한 신도시. 방송사 아나운서 출신의 종찬(김주혁)이 예상을 깨고 집권 여당의 공천을 받아 기호 1번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 재순의 아성에 도전한다. 종찬은 미모의 아내 연홍(손예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여중 3년 딸 민진(신지훈)과 함께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


투표를 앞두고 양 진영은 치열하게 싸우는데 종찬이 재순을 뛰어넘는 게 쉽지 않다. 투표일 보름 전 민진이 실종된다. 연홍은 미친 듯이 딸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지만 종찬은 유세에 총력전을 펼쳐야 할 판인 데다 혹시라도 그 사건이 득표에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해 조심스럽다.


그런 종찬이 서운한 연홍의 감정은 그에게서 점점 멀어지더니 급기야 이혼을 선언한 채 민진을 찾는 데 집중한다. 경찰은 노골적으로 재순의 편에 서 그녀를 미친년 취급하면서 실종 당일 그 어떤 사고도 보고된 바 없다며, 불량 학생으로 낙인찍힌 민진이 애먼 짓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태도로 안일하게 대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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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찬의 집에서 도청 장치가 발견되고, 그의 선거 캠프는 재순을 강력한 범인으로 지목하지만 재순 캠프는 모략이라고 일축한다. 재순의 캠프는 연홍이 전라도 출신이고, 민진이 불량 학생이었다는 정황을 포착해 집중 공략하고, 그러는 사이 종찬의 지지율은 재순에게서 점점 더 멀어진다.

연홍은 민진을 추적해 가는 과정에서 딸이 자신에게 상당히 많은 것을 속여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평소 친하게 지낸 친구가 의외로 미옥이었음을 확인하고 그녀를 추궁하지만 뭔가 미심쩍다. 또한 민진의 이메일을 통해 지난 2년간 매번 시험지를 사전에 몰래 민진에게 제공한 사람이 바로 중1때의 여자 담임 선생이었음을 알고, 그녀를 만나 본 결과 또한 의심스러운 점을 발견한다.


그러던 중 처참하게 숨진 민진의 시체가 발견되고, 종찬과 그의 캠프는 재순을 의심하게 된다. 평소 똑똑하지 못했던 연홍은 처절한 정신적 고통 속에서 오히려 더욱 침착하고 영민하며 용감해진다. 경찰이 미옥을 강력한 용의자로 지목하지만 연홍은 그렇게 믿지 않고 독자적인 ‘수사’를 펼쳐 나간다. 그리고 미옥에 의해 살인자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는데.


영화라고 다 영화가 아니다. 진정한 영화가 되기 위해선 관객을 확 휘어잡을 수 있는 빈틈없는 시나리오와 이

를 화면에 가장 적확하고 적절하게 구현해 낼 수 있는 연출력, 그리고 작가와 감독이 만든 캐릭터와 시퀀스를 완벽하게 소화해 내는 배우의 표현력 등 삼위일체가 이뤄져야 웰 메이드 필름이란 소리를 듣고 흥행에 가까워진다.


그런 기준에서 이 영화는 정말 훌륭하다. 미스터리 스릴러를 표방하지만 기득권자 혹은 기성세대의 어긋난 욕심과 부도덕한 욕망이 청소년을 어떻게 왜곡하고 방황하게 만들며, 그래서 그들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생채기를 남기는가에 대한 천근만근의 묵직한 주제 의식을 발판으로 하는 드라마가 매우 탄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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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기본 축은 애끓는 모성애이다. 영화는 왜 부성애보다 모성애가 더 자주 거론되고, 더 강하다는 의식이 만연해 있는지 은연중에 부각한다. 이뿐만 아니라 세상과 자식을 바라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다른 시각도 있다. 연홍은 민진의 방을 뒤져 발견한 딸의 일탈 행동 증거에 대해 단지 종찬에게 “여보, 민진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착한 딸은 아니었나 봐요.”라며 자책한다.


그런데 종찬은 민진의 방에서 발견한 말버러 담배를 연홍에게 신경질적으로 내던진다. ‘다 당신이 교육을 잘못 시킨 탓이야’라는 듯이. 그 던짐은 딸에 대한 애정의 내려놓음의 은유이다. 자식에 대한 실망의 결과는 어머니는 자책과 연민이지만 아버지는 분노와 포기라는 비유이다.


엄청난 정치 풍자 혹은 조롱도 담겼다. 너구리 같은 재순도, 신선한 젊은 피 종찬도 그 주변 인물들조차도 결국 모두 개인적 성공에 눈먼 속물들에 불과하다. 종찬의 오른팔인 사무국장은 예전에는 재순의 최측근이었다. 그는 경찰의 수사 일지를 구해 달라는 연홍의 명령을 불법이라고 단호하게 거부하지만 종찬의 지지율이 급상승하자 서슴없이 거래를 통해 입수해 건넨다.


배경은 나름대로 도시인데 분위기와 색감은 칙칙하고 어두우며 음산하기까지 해 스릴러적 분위기를 극대화한다. 각 시퀀스의 전개는 도무지 한숨 돌릴 틈을 안 주며 긴박하게 돌아가고, 매 쇼트와 대사 하나, 단역 배우 한 명마저도 집중하게 만드는 흡입력이 여느 수작 못지않다. 무섭고 스산하면서도 슬프고 아프며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하다.


민진은 학교에서 ‘왕따’였다.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서 살다 왔고, 부유하기 때문에 명품 시계를 차는 등 남들과 차림새가 달랐으며, 툭하면 영어를 구사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미옥은 처음엔 그런 민진이 혐오스러웠다. 그런데 운전기사로 일하는 아버지가 모시는 오너가 바로 종찬임을 알고 나선 반감보다 더 큰 주눅이 앞으로 밀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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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옥은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외동딸인데 어느 날 아버지가 새 장가를 들어 줄줄이 이복동생을 넷이나 낳았고, 좁아터진 집안엔 할머니까지 함께 살았으니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세상은 그녀에게 ‘꿈 많은 소녀’가 되길 강요하지만 환경은 외진 구석으로 몰아넣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민진에겐 더 큰 아픔이 있었다.

그래서 두 소녀는 펑크 밴드를 결성하고 직접 가사와 곡을 써서 또래 아이들과 소통하는 가운데 자기들만의 세계(공간)를 만들어 갈 수 있었다. 그건 ‘와일드 로즈 힐’(찔레꽃 언덕, 영화의 주제곡)이었다. 찔레는 전국의 산, 들, 계곡 등 자연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야생초로 등산객에겐 귀찮은 존재이다.


하지만 꽃부터 뿌리까지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훌륭한 식용 풀이자 약재이다. 산의 주인이 자신인 줄 착각하는 다수의 등산객(기성세대, 기득권층)은 이 하찮은 들풀(청소년의 꿈)이 성가시다며, 가차없이 짓밟거나 심지어 제거한다. 자연의 모든 것은 저마다의 탄생과 생존의 이유가 있기 마련이고, 그게 삼라만상의 이치인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는 오만에 빠져있다.


기성세대는 젊은이의 꿈을 무시한 채 자신들의 노후 대책이란 명목으로 이기심만 불태운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문화와 문명이겠지만 우월한 것은 과학이 아니라 사랑이고 정서이다. 하찮은 찔레꽃에조차 존재의 이유를 인정해 줄 때 사람의 주도권과 문명의 찬란함은 비로소 사랑으로 인해 우뚝 설 수 있다고 영화는 펑크 록처럼 기괴하게, 때론 잔혹한 동화처럼 서늘하게 절규한다.


“악마는 멀리 있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있는 그 누군가이다.”라는 대사는 매우 현사실적으로 와닿는다. 그건 어긋난 욕망이다. 손예진의 연기는 불꽃이 튄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정도이다. 김주혁에게서는 ‘독전’의 중국 조폭 두목 김하림의 징후가 보인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재조명이 절실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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