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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헤르만 헤세 Oct 22. 2021

그 애의 피부는 유난히도 하얬다


11살, 새 학년이 시작된 우리는 낯선 교실에 앉아 담임선생님을 기다렸다. 3월이었지만 여전히 쌀쌀한 날씨에 다들 두꺼운 겉옷을 겹겹이 껴입고 있었다. 교실 뒤편에 앉아 1년간 함께할 친구들을 한 번씩 훑어보았다. 전에 알던 친구도, 처음 보는 친구도 있었다. 그중 제일 앞쪽 책상에 앉아있는 한 여자아이에게 시선이 멈췄다. 갈색 머리카락의 여자애. 멍하니 칠판을 바라보고 있는 그 애의 피부는 유난히도 하얬다. 또래 여자아이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선생님이 들어오신지 오래였지만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 애를 몰래 힐끔거렸다.


선생님이 출석 체크를 했다. 이름을 부르면 “네!” 하고 손을 드는 형식이었다. 남자아이들부터였다. 내 이름이 불리자 평상시보다 목소리를 신경 써서 대답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여자아이들 차례였다. 궁금했다. 저 친구의 이름이 무엇일지.     


“000”     


“네.”     


맑은 목소리였다. 저런 이름을 가졌구나. 그 애의 이름도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다. 4학년 첫날은 기분이 내내 묘했다. 묘한 기분은 1년 동안 이어졌다. 등교하는 아침이 기대가 되었다. ‘안녕.’하고 그 애와 인사를 할 때면 귀가 뜨거웠고, 교실 앞으로 나와 발표를 하는 수업 시간에는 유독 그 애의 시선만 신경 쓰였다. 부모님이 보는 드라마의 남녀 배우가 말하는, 좋아한다는 마음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 걸리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그럴 필요 하나 없었는데, 그때의 난 몽실몽실한 그 마음을 어쩔 줄 몰라했다.


그 애의 주변에는 항상 친구들이 가득했다. 곁에 있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깔깔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무리에 끼고 싶었다. 그런 바램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 애와 나는 이상하리만큼 접점이 없었다. 짝을 지어 운동을 하는 체육 시간에는 매번 어긋났고, 2주마다 앉는 자리를 바꿨는데 단 한 번도 짝이 되어 본 적이 없었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그 애를 보며 남몰래 아쉬움을 삼켰다. 먼저 다가가 말을 걸어 보기에는 용기가 없었다.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꽁꽁 숨기며 겨울바람이 다시 찾아왔다. 새롭게 뽑은 자리 배치에 가슴이 방방 뛰었다. 내가 앉은 곳의 바로 뒤쪽, 그리고 그 옆에 그 애가 앉았다. 짝꿍이 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이 정도로 가깝게 지낼 수 있다는데 감사했다. 게다가 내 짝꿍이 그 애와 평상시에도 친하게 지내던 친구여서 자연스럽게 대화에 낄 수 있었다. 쉬는 시간이면 뒤로 돌아 이야기를 했다. 종이 울리고 수업이 시작되면 뒷머리가 간질거렸다. 그 애와 나눴던 말을 곱씹으며 혼자 배시시 웃었다. 언젠가 한 번은 자유 시간에 나와 내 짝꿍, 그 애와 그 애의 짝꿍 넷이서 보드게임을 했다. 그 애 가까이서 함께 웃음을 터뜨리며 했던 게임은 그동안 했던 보드 게임 중에 최고로 재미있었다. 활짝 짓는 그 애의 미소가 참 예뻤다. 그 해 가장 행복했던 2주였다.

즐거운 시간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그 애와 어느 정도 친해진 것 같았을 때, 자리가 또 바뀌었다. 서로의 거리가 멀어지자 말을 걸 기회를 더 이상 잡지 못했다. 겨울 방학이 지나고 5학년 새로운 반을 배정받았다. 그 애와 같은 반이 되기를 내심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학년이 바뀌어도 마음은 여전했다. 혹시라도 만날 수 있을까 일부러 그 애의 교실을 지나갔다. 그럴 때마다 긴장이 되었다. 학교 복도에서 마주치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인사를 했다. 아쉬운 기분에 뒤를 돌아보면 그 애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걸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졸업을 했다. 졸업식 때만큼은 꼭 마주 보고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넘치는 인파에 그 애는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기를 기도하며 마음속으로 잘 지내라고 전했다.     


유년의 기억을 돌이켜보면 그 애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친한 친구도 아니었고, 둘 사이에 특별한 일도 있지 않았지만 그 애의 모습만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가끔씩 궁금하다. 그 애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지, 어떤 어른으로 자랐을지. 글을 쓰다가 갑자기 생각나 집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놓여있던 초등학교 졸업 앨범을 꺼내보았다. 난 6학년 1반, 그 애는 4반. 기억 속 그대로 하얀 피부의 그 애가 웃고 있다. 덩달아 나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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