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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헤르만 헤세 Nov 17. 2021

내가 있을 곳


쌀쌀한 바람이 불어온다. 아직 이른 시기이지만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어서 옷장에 둥글게 말려 있던 롱 패딩을 꺼내 입었다. 발레단으로 가기 위해 밖으로 나가니 나처럼 두꺼운 겉옷을 입은 사람들이 꽤 있었다. 다시, 계절이 바뀌고 있다.     


정강이는 다행히 조금씩, 아주 조금씩 좋아지고 있는 게 느껴진다. 어색했던 턴아웃과 플리에가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던 발목도 흔들리던 코어 근육도 어느 정도 잡힌다. 잔뜩 몸에 힘이 들어가 떠있는 무게 중심도 차분히 가라앉혔다. 부상 전에 춤을 췄을때 보다 더욱 내 몸에 귀를 기울이고 기본적인 것들에 신경을 쓰다 보니 움직임이 조심스러워졌다. 물론 아직 높은 점프나 빠른 동작은 시기상조다. 클라스를 하다 보면 점프 스텝까지 하고 싶을 때가 많지만 그 마음, 눈 꾹 감고 무시해버린다. 조급해져서는 안 되니까. 이 정도로 춤을 추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     


이번 <호두까기 인형> 공연에 군무로 들어가기로 했다. 전에 많이 해봤던 역할이기도 하고, 격한 동작을 해야 하는 건 아니어서 복귀를 위해 몸을 적응시킬 겸 출연하기로 마음먹었다.     


발레단 리허설에 들어갔다. 2019년 이후 제대로 된 리허설을 해본 적이 없으니 거의 2년 만이었다. 슈즈를 신고 발목을 돌려주며 리허설 시간을 기다리는데 가슴이 설렜다. 이게 뭐라고. 매번 하던 리허설일 뿐인데. 오래된 옛 연인과 약속을 잡고 기다리는듯한 묘한 기분이었다. 같이 리허설을 하는 형, 누나들이 와서 웃으며 내게 축하해주었다. “이게 얼마만이야”, “기분이 어때?”, “조심해서 해.” 한 외국인 친구는 조금만 불편하면 바로 이야기하라고, 자기가 대신해주겠다고 했다. 아직 리허설을 시작하지 않았는데도 몸 안쪽에서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익숙한 음악과 함께 파트너의 손을 잡고 포즈를 잡았다. 걸어가는 스텝만 했을 뿐이었지만 땀이 흘러내렸다. ‘참 오래 쉬기도 했구나.’ 마스크 사이로 짭짤한 맛이 났다.  흐르는 음악, 연습실의 분위기, 리허설을 봐주시는 선생님의 목소리, 움직임이 멈추면 주변을 채우는 헐떡이는 호흡까지. 모든 것이 정겨웠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곳이었다. 내가 있을 곳은 아직, 춤을 추는 연습실과 무대였다.     


큰 부상과 여전히 이어지는 긴 기다림의 시간. 마음속 한 구석에는 언제나 의구심이 들었다. 다리가 영영 낫지 않으면 어쩌지. 이대로 무대를 끝내버리면 어쩌지. 이번 리허설이 그런 어두운 생각을 한 번에 지워주었다. 나는 여전히 춤을 추면 즐거웠고,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무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후련해졌다.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더 들던지 간에 반드시 무대로 돌아가 힘껏 뛰어오르겠다고 나와 약속했다.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새로운 부위에 근육통이 찾아오지만 마음만큼은 근래에 가장 편하다. 쓸데없는 의심을 이제 하지 않아서 그런가, 언젠가 꼭 복귀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마음을 내려놓고 한 스텝, 한 스텝 발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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