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춤추는 헤르만 헤세 Jan 09. 2022

굽은 등의 아이러니


“어휴, 저 등 굽은 것 좀 봐라.”


책상에 앉아 있는 내게 엄마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오래 들었던 잔소리였기에 흘려들었다. 그래, 그래도 한번 펴줘야지. 푹 숙여진 채로 긴 시간 앉아있어 뻐근한 등을 한번 쭉 늘려주었지만 잠시 후, 편한 자세로 되돌아갔다. 엄마도 포기했는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는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발레를 시작한 이유가 바로 이 굽은 등을 교정하기 위해서였다.     


내 몸은 유난히 약했다. 잘 먹지도 않는 비실비실한 남자아이. 흔한 닭다리 하나 제대로 뜯지 못하는 나를 보고 엄마는 속이 탔다고 한다. 배에 힘이 하나 없어 굽어 있는 등도 안타까웠다고. 뭐라도 시켜야 할 것 같아 이것저것 알아보던 엄마는 발레가 자세 교정에 좋다는 말에 6 살, 내 손을 잡고 동네 문화센터를 향했다.     


반짝 빛나는 투명한 유리 거울로 둘러싸여 있던 스튜디오에는 여자아이들만 가득했다. 공주님 옷 같은 핑크색 튜튜를 입고 포인~ 플렉스~ 하며 스트레칭을 하는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난생처음 발레 슈즈라는 걸 신어 보았다. 쭈뼛쭈뼛 동작을 따라 하던 나. 오래전 일이라 흐릿하지만 어색해하지 않고 열심히 움직였던 내가 기억난다. 좋아하는 만화 애니메이션 ‘디지몬’처럼 엄청 재밌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싫지도 않았다. 발을 꼼지락 거리고, 팔을 이리저리 휘젓고, 폴짝폴짝 뛰는 동작들이 신기했다. 다음 시간에도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발레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문화센터에 가서 발레를 했다. 몇 번 하고 그만 할 것 같았던 취미 발레는 무려 2년 동안 이어졌다. 그런 관계가 있다. 첫 만남은 그저 그랬지만, 알고 지내며 함께 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매력을 느끼게 되는 관계. 자신도 모르게 스며드는 그런 관계. 발레와 나의 관계가 그러했다. 알고 있는 동작을 응용해서 새로운 스텝을 배우게 되면 기분이 좋았고, 빙글빙글 돌다가 꽈당 넘어져도 재미있었다. 중간에 집이 이사를 했을 때도 새로운 문화센터를 찾아 이어서 할 정도로 꾸준히 발레를 했다.     


8살이 되던 어느 날, 평소대로 수업을 하던 도중 ‘어떤 동작’을 하다가 갑자기 묘한 느낌이 찾아왔다. 발레가 새롭게 느껴졌다. ‘발레,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동작에 대해선 다음 글에 써보려고 한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엄마에게 가서 말했다. 발레 진짜로 하고 싶다고. 너무 재밌다고.     


그렇게 나의 춤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구부정한 자세를 고치기 위해서 시작한 발레는 인생이 되었다.

앉을 때 구부정한 등은 여전하지만.


발레를 배운 이후로 몸이 튼튼해졌다. 전신 근육을 모두 사용하기 때문에 힘도 좋아지고, 움직이는 양이 많다 보니 밥도 전보다 잘 먹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리에 앉아 있을 때만큼은 배에 힘을 풀고 등을 굽히고 있는 게 편하다. 워낙 꼿꼿한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발레를 전공으로 해서 그런가, 평상시에는 마음 편히(?) 있고 싶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내 등은 굽어져 있네. 하하. 아마 앞으로도 고치기 힘들 것 같다.


굽은 등의 아이러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빌리 엘리어트였을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