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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헤르만 헤세 Jan 05. 2023

저는 잘하고 있을 까요


1.1이라는 숫자는 신기하다.


별다를 것 없이 똑같은 하루일 텐데도, 무언가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


그래서 다시 브런치를 열었다. 마지막 글이 5월. ‘작가님 글을 못 본 지 무려 210일이 지났어요. 작가님 글이 그립네요.’라는 알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브런치가 그리웠다. 사실 손가락 한 번만 꾹 누르면 언제든지 오갈 수 있는 곳이지만, 쉽사리 앱으로 손이 가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작년 3월, 복귀 무대를 마쳤다. 다시 춤을 출수 있음에 감사했다. 아직 완벽하게 낫진 않았던 다리, 조심히 관리하면 점차 좋아질 거란 희망을 가졌다.


그 ‘아직’이 문제였다. 부상은 계속 발목을 붙잡았다. 발레단에서 다음 공연의 캐스팅을 주었다. 욕심이 났다. ‘이 정도면 할 수 있겠지?’


바보 같은 생각.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좀 괜찮다 싶어 뛰면, 다음 날은 너무 뻐근해서 걷기도 힘들었다. 며칠 쉬면 조금 나아졌지만 또 점프를 하면 어김없이 아팠다. 춤췄다가 쉬었다가, 춤췄다가 쉬었다가. 그 과정이 반복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쩔 수 없이 캐스팅을 포기해야만 했다. 아직은 무리일 것 같다고 감독님께 말씀드렸다. 다른 무용수가 대신해서 나의 역할을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속이 뭉그러져 갔다. 사람들 앞에선 애써 괜찮은척했지만.


언제까지 다리가 아픈 걸까. 완벽히 낫기는 하는 걸까. 너무 이른 시기에 복귀를 한 걸까. 2년이 넘게 고생했는데 왜 아직도 부상으로 스트레스 받아야 하지. 또 쉬어야 하나. 그래도 똑같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반복되는 고민. 엄마가 급해지지 말라 했다.


“내가 안 급하게 생겼냐고!”


짜증만 늘었다. 복귀하면 뭐해. 아파서, 다시 부러질까 봐 무서워서,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데. 복잡했다. 기분이 들쭉날쭉, 종잡을 수가 없었다.


9월, 발레단 지방 공연으로 영덕 예주에 갔을 때였다. 묵었던 숙소의 열린 창문으로 쏴아아, 시원한 파도 소리가 들리는 밤. 통 잠이 오질 않아 넷플릭스를 틀었다. ‘보다 보면 잠 오겠지.’ 그렇게 핸드폰을 보길 한 시간, 두 시간. 영화에 집중도 못하고,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멍하니 누워있다가 슬쩍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이제는 진짜 자야 돼.’


행여나 같이 방을 쓰는 형이 잠에서 깰까 봐 조심스럽게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심각했다. 헝클어진 머리, 퀭한 다크서클, 바짝 마른 입술, 붉게 충혈된 눈까지. 덜컥 겁이 났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순식간에 목이 멨다. 무서웠다. 정말 이대로 끝인 걸까? 처음으로 발레를 그만두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을 뛰쳐나와 침대로 몸을 던졌다. 베개 속에 얼굴을 파묻고 꺽꺽 울었다. 가슴이 아팠다. 누군가 양손으로 꽉 쥐어짜는 느낌이었다.


다 싫었다. 정강이도, 발레도, 잠도 편히 자지 못하는 밤도. 내가 미웠다.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힘들어도 먼저 마음을 접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때, 알았다. 다시 쉬어야 하는구나.


두 번째 휴직서를 냈다.


아무런 아쉬움도 없었다. 지금까지 부모님, 발레단 선생님, 선배들과 휴직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눠봤지만, 언제나 ‘그래도 할 수 있지 않을까?’란 헛된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그날 밤 이후로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마음이 이렇게 엉망인데 무슨 춤을 추겠어. 그렇게 기약 없는 휴직에 들어갔다.


****


그냥 하루를 보냈다. 발레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글이라도 써볼까 했지만, 노트북을 펼 엄두도 못 냈다. 집중이 전혀 되지 않았다.


나는 무얼 하며 살아야 할까?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발레를 더 이상 못한다면. 그렇다면 다른 일을 찾아봐야 하는데, 내가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지? 아, 나는 발레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가.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또 두려워졌다. 내가 이렇게까지 부정적인 사람이었나? 스스로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 답답한 심정을 일기장에 털어놓아 보아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 시기 즈음, 책을 한 권 읽었다.


좋아하는 고수리 작가님의 신작. <마음 쓰는 밤>. 카페에 앉아 천천히 읽다가 ‘너는 아름답단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나는 멈추게 되었다. 22살의 작가님이 아프다고 고백한 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얼마나 더 아파야 하는 건지 눈물을 흘리며 10년 뒤의 자신에게 쓴 편지였다. ‘언니, 나는 아파요’라고 시작하며 현재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데, 그 편지의 일부분을 읽었음에도 난 울컥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나도 편지를 쓰자.


24살의 임선우가 34살, 10년 후의 임선우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자.


읽던 책을 잠시 접어두고, 집에 돌아와 편지지를 꺼냈다. 편지지를 앞에 두고 잠시 머뭇거렸다. 크게 심호흡을 한 후, 펜을 들었다.


To. 34살 임선우.


‘형, 안녕하세요.’


어색한 첫 문장을 썼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 가슴속에 깊이 묻어두었던 솔직한 마음이 물 흐르듯 쓰였다.


요즘 나의 상황을 설명했다. 너무 힘들다고 했다. 주체할  수 없이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이 무섭다고도 적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투정도 부렸다. ‘다리는 다 나았겠죠?, 제가 발레를 계속하는 게 맞을까요?, 저는 잘하고 있는 걸 까요.’라는 아직 듣지 못할 질문도 썼다.


사각사각. 펜은 멈추지 않았다. 이 편지가 뭐라고, 자꾸만 슬퍼지는 걸까.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글씨가 번졌다. 또 한 방울. 이러면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잖아. 휴지로 코와 눈을 닦고, 편지를 이었다.


어느새 2장을 가득 채웠다. 마지막은 이렇게 썼다. 10년 뒤에는 지금 일들을 웃으며 추억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편지를 읽으면 긴긴 답장을 해달라고. 그래. 마지막 문장을 쓰면서 깨달았다.


나는 내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가슴 아픈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고 마지막 순간에,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게 무대에서 춤을 추는 일이든, 글을 쓰는 일이든, 그 어떤 일이든.


‘너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그냥 태어나 그대로 상처 입고 피어날 뿐이야. 그토록 아프게 짓밟혔지만, 온 힘을 다해 견뎌낸 너는 언제나 활짝 피어난단다. 잎보다도 먼저, 너를 괴롭힌 불행의 방향을 향해, 찬바람을 맞닥뜨린 채 꼿꼿하게. 금방 질 것을 알고도 흐드러지게 피는 하얀 목련처럼. 넌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거야. 나는 말이야. 그런 네가 아름다워. 너는 아름답단다.’


작가님은 10년 전의 어린 자신에게 이렇게 답장했다. 아프게 짓밟혔지만, 언제나 활짝 피어난다고. 너는 아름답다고.


10년 후의 나는 어떤 답장을 보내게 될까.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일기장에 테이프로 꽁꽁 붙여놓은 편지처럼, 그냥 잊고 지내보려 한다.


편지가 도움이 되었는지, 싱숭생숭했던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졌다.


모르겠다. 흘러가는 대로 살아보자고 생각을 정리했다. 계속 머리 싸매고 고민해 봤자 달라질 건 없으니까. 조금 세상을 가볍게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한 걸음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스크린도어가 열립니다.

거칠게 몰아붙이던 세상의 요구에

지친 하루들이 저마다의 고민을 품고

무거운 어깨에 고개를 파묻습니다.

그래도 한 번쯤 창에 비치는 당신에게

환하게 미소 지어주세요.

세상 단 하나밖에 없는 소설의

주인공은 바로 당신입니다.

그리고 그 소설은 반드시 해피엔딩이죠.

어쩌면 오늘은 아름다운 결말을 위해

잠시 머무는 에피소드였을지도 모릅니다.

출입문이 닫힙니다.

열차가 출발합니다.

가장 찬란한 당신의 목적지를 향해서요.


어두운 생각이 들 때마다 습관적으로 내가 쓴 시를 찾아 읽는다. 그저 오늘 하루도, 아름다운 결말을 위한 하나의 조각이었을 뿐이라고. 마지막 순간만큼은 찬란하게 웃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 주문을 외우듯 읽는다.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기다리면 답이 오겠지. 그냥, 살아보자.


나에게 미소 지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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