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프리다 May 11. 2023

10. 우리는 밤에

<일상여행>

어젯밤엔 앞집 이웃을 만나 소량의 음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둘 다 글쓰기 선생님이다. 그녀는 대학에 출강하고 나는 제도권 밖에 있다는 게 다를 뿐이다. 수학도 아니고 과학도 아닌 글쓰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글과 사람과 가치와 의미와 본질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화요일은 우리 두 사람에게 수업이 있는 날이고, 어떤 화요일은 수업을 마치고 나면 가슴이 빵빵하게 부풀어 있다. 어제는 그녀가 그런 날이었고 나는, 실은, 그 전날인 월요일에 그랬다. 그날 30대 수강생은 내가 ‘귀신’이라고 했다. 자기 생각을 정확하게 알아주고 이건가 저건가 헷갈릴 때 분명한 가르침을 주기 때문에. 매주 배우는 게 많다는 그이의 말에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다. 이 일을 한 지 20년이 넘었다. 그러나 새로운 팀은 언제나 새로운 모험이었다. 사람이 같지 않고 그들의 상황과 요구와 편차가 다 다른 탓이다. 비제도권에서 소수의 사람을 만나는 만큼 내가 만든 커리큘럼은 그저 참고용이다. 새로운 팀-커리큘럼 조정-맞춤 설계라는 과정을 20년 넘는 세월 동안 반복해 왔다. 어제 그녀 수업은 플라톤의 《국가》였던 모양이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학생들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이 됐다. 몇 년 전 그녀의 도서관 강연을 한 번 들은 적 있다. 내용도 전달력도 몸가짐도 선생님이라는 위치를 제대로 관통하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내가 그동안 만나온 선생님 중 단연 최고였다.


우리는 같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세상과 삶에 대해 비슷한 생각이 있고, 생각이 다를 때면 대화할 수 있도록 가슴을 열어놓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비슷한 사람인 건 아니다. 우리는 서로 아주 다른 사람들이다. 나는 가끔 그녀의 엄정한 까다로움에 숨이 막히고 아마도 그녀는 가끔가다 뚜껑 열린 길 위에 맨홀 같은 나의 허술함이 어처구니없을 것이다. 눈대중만으로도 간격과 수평을 제대로 맞춘 바느질을 하는 사람이 그녀라고 한다면 나는 상황에 따라, 가령 그게 행주용이라면 바느질쯤 삐뚤빼뚤해도 괜찮다고 말한다. 그런 두 사람이 몇 년간 앞뒤 이웃으로 지내고 있다. 이웃이라니! 그렇게 오래 왕래하며 지낸 이웃은 처음이다.


술을 끝내고 함께 동네를 걸었다. 하늘을 바라보니 나무와 나무 사이에 커다란 달이 둥싯 걸려 있었다. 얼마나 크던지 깜짝 놀랐다.

달이 참 신기하네요.

내가 말했고 그녀는

저런 달은 우리 핸드폰으로는 어림없어요.

하고 말했다.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읽은 것이다.

발길이 여러 곳을 향했다. 내가 사는 건물 한 바퀴, 좌측 길로 한 바퀴, 건물과 건물 사이 공원 같은 길도 한 바퀴.

나는 스킨십을 싫어하는데 쌤한테 팔짱은 내가 끼고 있네요.

그녀가 말했고 나는

늘 쌤이 팔짱을 껴요. 그래서 쌤이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모를 뿐이죠.

하고 말했다.


우리 동네에 처음 온 사람들은 우리 동네가 프랑스 같다고 말한다고 한다. 가 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우리 동네는 저녁이면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 나온 주민들이 많다. 온통 고층 건물 일색이지만 곳곳에 나무가 작은 숲을 이룬다. 항상 손님들로 붐비는 기사 식당이 있는가 하면 다른 동네에서도 찾아올 만큼 브런치 맛집이 있고, 막걸리 소주 맥주 사케와 와인 다양한 주종의 술집들과 카페와 LP 바가 있다. 내가 사는 곳 반경 5킬로미터 이내로 LP 바가 네 군데가 된다. 그중 한 곳은 가끔 친구랑 가기도 한다. 맥주 한두 병에 듣고 싶은 음악을 신청하면 연세 지긋한 주인장이 레코드로 들려주신다. 점포들 사이사이 어디에서나 공원 같은 길과 이어져 있는 우리 동네는 한잔하거나 한 끼 먹은 후 걸을 수 있다. 그게 참 좋다.


그런 동네를 나는 이제 슬슬 떠나려 한다. 한 군데서 오래 살았다는 느낌이 나의 등을 자꾸 떠민다. 수업 나가고 운동하러 공원에 가는 거 말고는 집에서 글 작업만 하고 지내온 지난 몇 년이 답답해졌다.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 싶고, 현재로선 이사가 가장 현실적인 변화라는 생각이 크다.

이 동네를 못 잊을 것 같아요.

그녀에게 말했다.

네, 그러실 거예요.

그녀도 내게 말했다.


한참 걸었다. 인제 그만 각자 집으로 돌아갈 때다. 나는 다시 한번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 달이 안 보이네요. 쌤, 편히 쉬세요.

그녀는 그녀 집으로 나는 내 집으로 뒤돌아섰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머릿속으로 문장 하나가 물처럼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이 동네를 못 잊을 것 같아.

#이웃 #우리동네 #밤산책

작가의 이전글 9. 그리운 시냇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