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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다 May 18. 2023

11. 나폴레옹 와인

<일상여행>

또 다른 공간이 필요했다. 최고로 친다는 프랑스 보르고뉴 레드 와인 품종인 피노 누아도 재배 환경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하지 않던가. 지금의 내 공간은 안전하고 고요했으나 매혹이 빠진 채였다. 어느 날 누군가의 속삭임이 귀에 들렸다. 순한 양처럼 살아왔잖아. 원하고 끌리는 대로 따라가 보는 거야. 기꺼이,라고 할 순 없으나 마음속 두려움을 똑바로 응시하며 가보기로 했다.

들어선 길은 사방이 자갈이었다. 넘어져 다치거나 돌팔매를 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쉬고 싶어 찾아왔으니 사고가 난다 해도 감당할 만큼의 상처만 입고 싶었다. 현재가 안전한 건 마음을 배반한 결과. 잠깐의 일탈을 순순히 받아들인들 나 자신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도착지는 '샹베르땡'이었다. 스스로 황제가 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즐겨 찾던 곳. 일명 '나폴레옹 와인'이라 칭하는 고급스러운 세계. 개인적으로 그는 고독한 사람이었다. 독재라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프랑스 대혁명 이후 불안했던 정세를 안정시키는 동안 그의 곁을 지키는 참모는 일절 없었다. 모든 상황을 나폴레옹 혼자 판단하고 혼자 결정했다. 샹베르땡은 아마도 유일한 안식이자 위로였을 터. 그 안에 기꺼이 안겼을 고독한 개인을 상상하자,


​'내 안의 나폴레옹'이 나를 불렀다. 나는 선택한다, 쥬브레 샹베르땡 레 뮈로를. 단맛은 아닌 농익은 과일들에서 나는 정염 어린 맛. 검붉은 체리이거나 새까만 블루베리가 통째로 으깨져 포도와 함께 발효되어 피어오른 향. 케이크 위에 얹힌 부드러운 생크림처럼 캐러멜과 시나몬이 섞인 맛과 향의 결합. 이놈, 개성이 강하다. 부드럽지만 쎄다!


​쥬브레 샹베르땡 레 뮈로는 세 단계의 맛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50 미터쯤의 가시거리를 확보한 안개 같은 첫맛. 아, 이게 무얼까.. 아련했던 호기심이 눈을 반짝 뜰 무렵 살그머니 다가오는 중간 단계의 강렬한 유혹. 이어 농익은 과일들과 아로마 향신료들이 순식간에 밀고 들어와 목 안을 타고 넘는다. 나는 포로가 되고만 가여운 짐승이다. 그 모든 상황에 결박당한다. 끝 맛은 앞의 모든 미묘함과 화려함과 아찔함을 깔끔하게 수렴해 준다. 단정하다. 단계마다의 차이를 조화롭게 모으는 부드러움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위로의 향연이었다.


​"샹베르땡은 자기 연민을 가진 사람이 좋아하는 거야. 생각해 봐. 나폴레옹이 얼마나 자기 연민이 많았겠어."


​누군가의 이 말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위로받고자 했던 적은 없으나 위로할 인생을 살지 않는 사람이 어딨겠는가. 쥬베르 샹베르땡은 나 자신도 모르는 연민의 선택이자 인생을 살아온 눈치가 원했던 유혹이었을지도. 삶은 오아시스를 찾아가는 사막의 여정이다. 샹베르땡 한 잔에 견디는 힘과 안락한 평화, 살아가는 의지를 다시금 재충전한다. '가장 진보적인 사람은 과거를 깊이 존중하며 다시 출발점에 서는 사람'이라던 프랑스 철학자 에르네르트 르낭의 말을 떠올리면서 마지막 한 잔을 털어 넣었다.

#와인 #사막 #오아시스 #나폴레옹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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