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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다 May 30. 2023

12. 사랑은 감자수프처럼

<일상여행>

글을 쓰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에 대한 로망이 있다. 진부하지 않게 쓰기란 쉽지 않아서 읽어보면 맛도 없고 멋도 없는 경우가 다반지사다.

언젠가 시나리오 쓰는 친구가 보여준 사랑 이야기에서는 라면이 문제였다. 이런 식이다. 남자가 길을 걷는다. 어디에선가 라면 냄새가 솔솔 풍긴다.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라면 냄새를 좇아 한참을 헤맨다. 헤어진 그녀는 라면을 끓이는 자기만의 방법을 갖고 있었다. 라면 냄새는 그녀의 향기였던 것이다.


사랑의 기억으로 라면이라. 공감되지 않았다. 라면 끓이는 방법이 특별해 봤자 뭐이 그리 특별할까. 친구에게 말했다.

"라면이 아니라 감자 수프라면 어떨까? 들어봐."


골목이 미로처럼 굽이굽이 이어진 동네가 있어. 도무지 카페가 있을 데가 아닌데, 희한하게도 이 골목에 카페가 있어. 딱 한 군데. 공간은 작아. 서너 사람 앉으면 꽉 차는 정도지. 이 카페에 비가 오면 나타나는 여자가 있어. 올 때마다 감자 수프를 먹지. 감자의 껍질을 깎고 양파랑 같이 버터에 볶다가 적당히 익으면 한 김 식힌 다음 건더기가 씹히지 않게 곱게 가는 거야. 우윳빛 감자 수프는 이 카페의 특별 메뉴야. 맛도 심심 모양도 심심하지만 비 오는 날 감자 수프는 마력이 있어. 한여름이라도 비가 오면 으슬으슬하잖아, 왜. 사람들은 말갛고 심심한 감자 수프 한 그릇에 가슴이 말랑말랑 데워져서는 비 오는 세상으로 씩씩하게 걸어 나가는 거야.

여자가 오랜만에 온 그날도 비가 내렸어. 여름을 앞두고 세상이 온통 푸르름에 뒤덮였지만, 창가 앞은 선듯선듯 한기가 서렸지. 여자는 그날도 어김없이 감자 수프 한 그릇을 주문해 먹고는 빈 그릇을 앞에 두고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었어. 그릇을 치우러 온 여주인이 처음으로 말을 붙였지.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네...

-늘 감자 수프만 드시던데... 맛은 괜찮으세요?...

-네...

-감자 수프 좋아하시나 봐요?

-어떤 사람 때문에요...

-사.. 람.. 이라뇨?...

-여기서 항상 감자 수프랑 커피를 주문했어요. 감자 수프는 제 꺼, 커피는 그 애 꺼였죠. 그 애는 늘 감자 수프를 뺏어 먹었어요. 하나 더 시키자 하면 번번이 거절했어요. 같이 먹는 게 맛있다면서...

-아, 남자 친구랑 오셨었구나. 지금 그분은 어디 계신데요?...

-모르겠어요...

-헤어지신 거예요?...

-네...

-저런...

-집에서 감자 수프를 만들어봤어요. 여기서 먹는 그 맛이 아닌 거예요...

-아아, 그래서 우리 집 감자 수프를 그렇게...

여주인은 그녀의 핏기 어린 손을 가만히 잡아주었어.


내 얘기는 여기까지다. 친구는 고개를 끄덕끄덕 주억거렸다.

​사랑은,

지나간 사랑은 가끔 맛의 기억으로 방문한다. 비라도 오는 날 방문한 그 맛이 라면이 아니라 감자수프라면 추억이 한결 담백하고 맑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별의 보랏빛 멍도 조금쯤은 옅어지지 않을까.

#감자수프 #사랑 #연애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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