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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인생 Feb 28. 2024

남의 떡은 언제나 더 커 보인다

1991년

90년대는 조기유학이라는 것이 막 시작할 때였고, 아이들은 이민 가는 급우들을 부러워했다. 겨울에 석탄 난로를 때고 여름에 책받침으로 바람을 부치면서 공부를 해야 하고 두발과 복장의 자유가 없는 건 물론이고 선생에게 매를 맞는 것이 예사였던 한국의 학교시스템이 열악하다는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이었다. 88년에는 외국의 선진 교육시스템을 다룬 다큐가 방영되었었는데, 거기에 따르면 영국의 섬머힐 학교란 곳에서는 학생들에게 무제한의 자유를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증거로 완전 나체의 여학생들이 풀장에서 수영을 하는 것을 잠깐 보여줬는데 그다음 날 학교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당장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섬머힐로 전학 가야겠다고 남자아이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어떤 아이들은 중학교 때부터 유학을 보내달라고 부모들에게 떼를 썼고 많은 아이들은 이민 간 나를 부러워했다. 미국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내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선생과 농담 따먹기를 하고 라커 앞에서 여자친구와 속닥대는 학교생활을 하는 줄 다들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외국의 학업량은 한국보다 훨씬 적다는 건 어디서 주워들어서 나에게 거기는 수업 따라가기도 쉽고 수학 같은 건 우리나라 국민학교 수준 이래매, 넌 문제없겠다 하고 아는 척을 했다. 아이들은 내가 다니는 학교의 전교생수를 궁금해했고 나의 전교등수를 물어보았다. 나는 학생수가 몇 명 인지도 몰랐고 그런 건 당시 캐나다에서는 아무도 관심 없어하는 정보였다. 기껏해야 Honor Roll이라고 성적 우수자들의 이름을 알파벳 순으로 벽에다 주기적으로 붙여놓는 것이 전부였다.


캐나다가 공부가 더 쉬운 게 사실이라면 이민 온 한국 아이들은 모두 다 우등은 따놓은 당상이어야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교포 아이들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자기들 나름대로의 분석을 내놓았다. 첫째 이유는 인종차별이었다. 영어도 못하니까 아이들도 무시하고 선생도 부당하게 점수를 깎으면서 깔본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한국인들은 단결해서 서로 숙제도 공유하고 시험시간에 커닝도 조직적으로 해야지 억울하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들 했다. 한국인끼리 모여서 매운맛을 보여줘야지 양놈들이 함부로 못 대할 게 아닌가.  실제로 중국아이들은 항상 몰려다녔고 거의 다 홍콩에서 온 부자들이었기 때문에 기가 셌고 거칠 것이 없았다.

얼핏 설득력 있는 주장이었고 나도 이것이 오랫동안 사실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런 말을 하는 놈 치고 평소에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보아도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싶을 정도로 잘해주는 선생들도 있었다. 세상에는 분명 차별이 존재한다. 그러나 항상 자기가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 번쯤 의심해 봐야 한다. 내가 모자라서 지금 이 모양 이 꼴로 산다고 인정하는 것보다 남 탓을 하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로 사람들은 영어를 들었다. 영어를 따라가기가 벅차니 성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학교 때 이민 온 아이들은 수년이 지나 졸업할 때가 되어도 영어가 매끄럽지 않았다. 나도 그랬다. 내가 하는 영어는 내가 듣기에도 항상 좀 어설펐다. 그런데 의외로 현지인들은 어설픈 영어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의미만 통하면 문법이 엉망인 말을 해도 다 알아듣는다. 그들은 나에게 "내가 한국에 갔어도 1년 안에 한국말을 네 영어실력만큼 하는 건 불가능해"라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고등학교에서는 영어를 그렇게 잘하지 않아도 교과과정을 다 따라갈 수 있다. 


내 말을 못 알아듣고 비웃으면 어쩌나 걱정하는 사람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완벽한 발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한국 사람들뿐이다. 인도나 중국 사람들은 자기네 악센트를 고치지 않아도 정치도 하고 회사도 잘 차린다. 얼마 전에는 한국에서 영국식 영어를 배우는 것이 유행이었다. 있어 보이고 2개 국어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게 그 이유였다. 재작년에 캐나다에 놀러 온 나의 중학교 동창은 에어비엔비 호스트에게 전화를 해서 아주 어설픈 영국 악센트로 체크인을 문의했혹시 조현병 이런 게 아닌가 놀란 나는 왜 그러냐고 물어봤고 "영국 악센트로 하면 아무래도 날 무시 못할 거 아냐"라고 답하는 그를 보면서 역시 한국인들은 아무리 외국 생활을 오래 해도 저 이상한 허세를 버릴 수 없는 것인가 생각했다.


게다가 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다 온 아이들은 이곳의 교육 시스템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가르치지는 않고 말만 계속 시킨다는 것이었다. "백인 들은 왜 이렇게 쓸데없는 걸 물어보냐? 책을 읽고 내 생각을 에세이로 종이 세 장을 꽉 채워 오랬는데 내 생각이 뭐가 중요해? 내가 뭘 알아! 병신들이 한가해가지고 쓸데없는 거나 물어보고 앉았어!" 수학 시간에도 객관식 문제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수식을 세우고 증명을 써 내려가야 했다. 전반적으로 학교에서는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자기 주장을 세련되게 펼치는 걸 원했지만 한국 아이들은 열심히 듣고 배우겠다는데 내 생각 같은 건 알아서 뭐 할 거냐는 입장이었다.  

지금 한국의 교육 방향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단시간에 많은 문제를 풀고 여러 보기 중에 정확한 답을 골라내는 전문가들을 양산하는 시스템은 캐나다와는 많이 다르다. 어디가 더 나은가는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전반적으로 학생들이 자기 생각을 갖는 것을 학교 측에서 반기지 않아 한다는 느낌을 준다.  나는 친구들에게 보내는 답장에 사실 한국처럼 힘들게 공부하는 건 아니지만 나름 다른 점이 많아서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건 단지 지금 영어가 서툴러서 그런 것이라고 여겼다.


이민 1.5세들의 특징은 공부에 전혀 취미가 없는 아이라도 성적은 어떻게든 잘 받아야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는 것이다. 의리 어쩌고 하면서 나에게 숙제 부탁을 하고 시험 커닝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내 경험으로는 한국인들은 유난히 애나 어른이나 조금 친해지게 되면 대놓고 뻔뻔하게 뭘 해달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나도 작문 숙제 같은 것도 많이 도와주곤 했고 몇 번은 아예 대충 다 써주고 손질만 해서 내라 한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 남한테 숙제를 해달라고 그럴 정도면 자기 것처럼 손질하는 것도 귀찮아하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점수가 잘 나왔지만 나중에 내가 해준 작문들은 낙제점을 받았고 이유는 "네가 쓴 거 같지 않다"였다.  선생들은 아이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바보들이 아니었다. 대부분 대가로 밥을 사주겠다 여자를 소개해 주겠다 했지만 지켜진 적은 거의 없다.


그러면서도 정작 중요한 정보는 웬만해서 남에게 잘 가르쳐 주지 않았다. 자기가 필기한 노트마저 보여주기 꺼리는 아이도 있었다. 내 노트를 보고 나보다 성적이 더 잘 나오면 그 꼴을 어떻게 보냐는 것이었다. 대학 와서도 그런 경우는 흔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미술을 전공하는 친구가 대학 이후의 자기 진로를 이야기하면서 "네가 미술 쪽이 아니니까 얘기하는 건데, 어떤 이름 있는 대학원에서 새로 전공을 만들어서 거기가 지금 들어가기가 좀 쉬워, 거기 나오면 취직도 잘 된대, 근데 이건 다른 한국 애들이 알면 경쟁이 세지니까 안되잖아, 그래서 비밀로 하고 있어." 인터넷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아무리 쥐좆만 한 정보도 정보랍시고 움켜쥐고 거드럭대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디 가면 교과서를 싸게 살 수 있다, 이 과목 학기말 고사는 매년 문제가 비슷한데 아는 형한테 잘 보이면 답지 있는 족보를 보여준다 등등. 나는 공부를 해서 시험을 치면 되지 왜 족보를 구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인지 나의 대학교 평점은 매우 낮았다.


캐나다인들은 의외로 그렇게 친하지 않은 사이라도 모르는 걸 물어보면 잘 가르쳐 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컴퓨터 전공으로 졸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인사만 한 사이라도 "이거 모르겠는데..." 하고 물어보았고 대부분 다들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회사에서도 나의 특기는 "이거 제가 모르는 건데 어디 가야 더 알 수 있을까요" 하고 물어보는 것이다.  적어도 IT 분야에서는 실력이 좋은 사람일수록 물어보는 것과 가르치는 것을 좋아한다.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란 것도 미국이나 유럽이니까 가능했지 한국에서였다면 자기 코드를 공개하는 사람은 단물만 쪽쪽 빨리는 호구가 되었을 것이다. 한국은 예로부터 아무리 작은 기술이라도 비법이라며 필사적으로 감추는 전통이 있다. 전래동화 중에 짚신장수 부자의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를 따라 짚신을 만들어 팔던 아들이 아버지만큼 짚신을 잘 만들지 못하자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유를 물었지만 아버지는 절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늙어서 죽게 될 무렵 아버지는 막 숨이 넘어갈 찰나에 아들 귀를 가까이 대게하고 "짚신코" 하고 숨을 거뒀다고 한다. 짚신의 코를 제대로 안 꿰어서 그랬던 것이다. 죽기 직전이 아니면 자식한테도 안 가르쳐 주는 게 비법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외부에서 누군가가 들어오면 무너지기 마련이다. 아이폰이 들어오기 전 핸드폰 요금을 더 걷으려고 제조사에 압력을 넣어서 와이파이를 막았던 통신사들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별것도 아닌 사람들이 뭐 하나라도 밥줄을 쥐면 울타리를 치고 남이 들어오지 못하게 필사적으로 막는다. 택시운전수나 약사나 의사나 할 것 없이 누가 자기 밥그릇을 건드릴라 하면 벌떼처럼 들고일어난다. 흥선대원군의 후손들 답다. 비법이니 노하우니 이런 걸 중시하는 사람들일수록 새로 뭘 배우는 걸 싫어하고 똑같은 걸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우려먹으면서 편하게 먹고 살 계획이겠지만 이제는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해서 그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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