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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인생 Jan 04. 2024

문화차이는 하루아침에 극복되지 않는다

1990년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학교에서 친구라고 부를 사람이 없었다. 내게 친구들이란 편지에 꼬박 답장을 해 주는 한국의 아이들이었고 여기서 친구란 걸 과연 사귈 수 있을지도 의심이 들었다. 사람들은 영어공부만 열심히 하면 현지인처럼 말할 수 있는 줄 알지만, 언어는 문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문화를 제대로 이해 못 하면 원어민의 의도를 제대로 잡아낼 수 없다. 

언어철학의 Speech Act 이론에 따르면 말에는 적어도 두 가지 행위와 한 가지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국이 짜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여기에는,  

locutionary act, 단순히 '이 국은 짜다'라는 정보를 공개하는 행위가 있다. 

ilocutionary act, 국이 짜다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너 요리 못한다'라는 주장도 전달하고 있다.

perlocutionary intent, 음식솜씨는 개뿔도 없는 년이 우리 집에 들어왔구나 라는 불만족을 암암리에 표현함으로써 며느리를 타박하는 의도가 있다.

문화를 모르면 아무리 영어를 많이 공부했어도 대화의 의미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특히 빙빙 돌려 말하는 영국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는 더욱 그렇다.  영화관은 불량청소년들이나 드나드는 곳이고 결혼상대는 부모님이 정해주시는 것이고 개는 바깥에서 키우는 법이라는 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영미문화권의 대화를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이해할 뿐이다. 나도 이곳 아이들이 농담이라고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그들도 내가 하는 말을 잘못 이해하곤 했다.  첫해는 그렇게 지나갔다.


캐나다는 딱히 겨울방학이라는 게 없고 크리스마스 기간 중 2주 정도 쉬는 것이 전부였다. 연휴 전날의 마지막 수업은 교양으로 들었던 사진과목이었는데, 나의 목표는 낙제만 면하는 것이었다. 영어가 서툴러 필름을 인화하는 법도 겨우 어깨너머로 배웠다. 우리 학교는 한 학년 높은 아이가 조교로 들어와서 아이들을 가르쳐 주고 학점을 따는 제도가 있었는데, 사진반의 조교는 눈이 허스키처럼 초록색이고 금발인 키가 작은 여자아이였다. 내가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웬만하면 가르쳐 주긴 했지만 가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때는 한숨을 쉬기도 했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다 집에 간 후에도 마지막 과제를 다 못 마쳐서 낑낑거리고 있었다. 이걸 못 끝내면 낙제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걸 본 조교가 걱정 말고 자기가 알아서 해 줄 테니 집에 가라는 것이었다. 다행이다 싶어 가방을 챙겨 나오던 중 날 다시 부르길래 뭘 놓고 갔나 하고 걱정하면서 돌아보자 그녀는 메리 크리스마스라며 웃어 주었다. 평소에 친절하긴 했지만 무뚝뚝한 인상의 아이였기에 의외라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가끔 그렇게 예상 못한 시점에 친절한 사람들이 종종 나타났었고 그랬기 때문에 겨우 이민 생활을 버틸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때는 크리스마스라 하면 뭔가 특별한 날이었다. 집은 따뜻했고 먹을 것은 많았고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니까- 하면서 서로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곤 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크리스마스 연휴는 대부분 집에서 여느 토요일처럼 보냈다.  밴쿠버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자기 집을 전구로 치장하는 집들이 많다. 어떤 집들은 놀이동산처럼 온 건물이 번쩍이기도 한다. 우리는 밤이 되면 차를 타고 그런 집들을 구경하러 다녔다. 우리는 서울에서 살 때도 크리스마스 때 시청까지 차를 타고 가서 시청 앞 크리스마스 트리를 구경하고 오곤 했었다. 휘황찬란한 집 앞에 잠시 차를 세우고 이야- 한번 해주고 떠나기를 두어 시간 정도 했던 것 같다. 우리는 부잣집일수록 크리스마스 장식에 진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문화를 몰랐던 우리는 양놈들은 돈 벌면 이렇게 쓸데없는 데 쓰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겨울이 오기 전의 토요일 오후에는 주로 잔디를 깎았다. 나의 첫 직장에서 영국인 상사가 그런 말을 했었다. 영국이 만든 제일 쓸모없는 발명품 중 하나는 잔디라고. 잔디는 정말로 아무 쓸모랄게 없다. 옛날 영국의 평민들은 한 평의 땅이라도 있으면 먹을 걸 심던지 물건을 가져다 놓던지 해서 땅을 놀지 않게 했지만 부자들은 '우리는 너네 같은 거지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하면서 그냥 잔디로 땅을 도배했다고 한다. 먹을 거 하나 안 나오는 잔디는 관리하려면 감자나 고구마만큼 노력이 필요하다. 깎아 줘야 하고 물도 자주 줘야 하고 잡초도 주기적으로 제거해야 하고 철마다 알맞은 비료나 흙을 덮어주어야 한다. 그게 초록색 천연 카펫을 유지하는데 드는 수고다. 이것이야 말로 완전 부자 놀음이지만 우리 같이 타국에서 이민 온 사람들은 잔디를 어떻게 가꾸는지도 몰랐고, 이웃에게 욕 안 먹으려고 깎기는 했지만 점점 정원은 민들레와 이끼로 덮여갔다.


우리 집은 노스 밴쿠버의 산과 가까웠기 때문에 종종 야생동물들이 드나들었다. 토끼나 여우는 물론이고 한 번은 사슴 한쌍이 우리 집 뒷마당에 들어와서 유유히 블루베리와 복분자를 따먹고 가기도 했었다. 사슴들은 크기가 생각보다 엄청나게 컸다. 수사슴은 뿔도 많이 자라 있었다. 우리는 거실에서 사슴들을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었고 아버지는 저걸 잡아서 녹용을 잘라올 수만 있다면 참 좋을 텐데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 무렵 한국에서는 사슴농장에서 사슴의 목에 빨대를 꽂아 생피를 빨아먹게 하고 돈을 받기도 했다. 주로 지금 내 나이의 아저씨들이 주 고객이었다. 비아그라가 흔해진 요즘은 아마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동네 신문에는 주택가에서 퓨마나 곰이 발견되어 마취총으로 포획해서 멀리 떨어진 곳에 풀어줬다는 기사들이 심심치 않게 났다. 그렇게 한번 먼 곳에 풀어놨는데도 다시 찾아오면 그때는 사살을 했다.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 어떻게 오는지 알고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죽일 거면 가죽이라도 벗겨서 팔지 했지만 왠지 이곳 사람들은 퓨마 가죽이나 곰 가죽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고 학교에서 그런 말을 아이들에게 하면 다들 질색을 했다.


문화란 것은 속성으로 배우기 어렵고 책으로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사람들 사이에서 같이 살아야만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다. 캐나다 사람들은 대체로 이민자들에게 친절했지만 어느 정도 선까지만 친분을 허용했고 한국처럼 어깨동무하고 술 먹고 노래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그것을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의 벽이라고 생각했고 특히 나 같은 1.5세들은 캐나다에서 살아남으려면 한국 사람들끼리 뭉쳐야 살아남는다고 믿었다.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 이민온 아이들은 현지인들과 거의 어울리지 못했다. 물론 인종차별도 있었지만 상당수의 경우는 문화 차이 때문이었다.  당시 나의 경험으로는 서양 사람들은 타 문화에 대해 대체적으로 열린 태도를 취하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이 있고, 한국 사람들은 타 문화에 대해 배타적이지만 일단 친해졌다 생각하면 무리한 요구도 스스럼없이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국도 이제 이민청을 설립하고 이민 문화를 개방할 것이라고 한다. 한국으로 이민 간 외국의 청소년들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살아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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