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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인생 May 14. 2024

이민 온 한국 아이들은 이상하다 (2)

1992-1994


92년 봄에 나는 첫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1-12학년은 다른 학교를 다녀야 했다.  우리 학교 졸업생 대부분은 인근의 Carson Graham이라는 학교로 대부분 배정을 받았는데, 한국사람들 사이에서는 거긴 한국의 공고 같은 곳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실은 그렇지는 않았고 대학진학률이 조금 낮을 뿐이었는데, 한국 부모들은 이민 와서도 어디가 명문고냐를 많이 따지기 때문에 가능하면 학구열이 높은 학교로 아이들을 보내고 싶어 했다. 내가 간 Handsworth 란 곳이 그런 곳이었다. 학교가 위치한 동네가 전문직들이 많이 사는 부촌이어서 부모들의 교육열이 꽤 높았고 한국처럼 의사나 변호사를 목표로 하는 아이들이 성적에 목을 매는 곳이었다.


그때의 내 생각에는 그래도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많은 학교를 다니는 것이 좋을 거 같아서 교장에게 부탁을 했다. 나는 당시 학교에서 나름 공부를 하는 아이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교장과 안면이 조금 있었다. 나는 졸업식에서 최우수 학생으로 뽑혔고 영어와 사회를 제외한 거의 모든 과목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상을 받으러 너무 자주 연단을 왔다 갔다 해서 나중에는 조금 눈치가 보였다. 교장은 추천서를 흔쾌히 써 주었고 그 덕에 Handsworth로 가게 되었다.


사실 본인이 공부를 혼자서도 잘 알아서 하는 스타일이라면 굳이 좋은 학교를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경쟁자들이 별 볼 일 없는 곳에 가야 등수를 쉽게 올릴 수가 있다. 그런데 남에게 잘 휘둘리는 아이라면 면학 분위기가 좋은 학교에 보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남들이 다 공부를 해야 자기도 따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혼자 자기 일을 알아서 하는 버릇을 조만간 들이지 않는다면 살면서 언젠가는 좋지 않은 사람들과 어울리게 될 것이고, 그때도 남에게 쉽게 영향을 받는 스타일이라면 어렸을 때보다 훨씬 더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내가 입학하던 해에 갓 이민온 다른 한국인들도 그 학교로 대거 몰려왔다. 그해부터 ESL과정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이 열성적인 한인 부모님들을 불러서 설명회를 열었는데,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학교 측에서 통역을 부탁했다. 나는 열댓 명의 한인 부모들 앞에서 그럭저럭 동시통역을 했고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나에게 호의적이었지만 그중 한 분은 나에게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어보았고 나는 성실히 통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저씨는 나를 부하직원 대하듯 짜증을 냈다.


그 아저씨는 아버지의 고등학교 대학교 선배에다가 예전 직장 상관이었다. 아버지 말에 따르면 아저씨가 머리는 매우 비상했지만 별로 인정머리도 없고 깐깐한 사람인데 항상 회사에서는 자식 자랑을 하기에 바빴다고 한다. 인덕이 없던 그 아저씨는 중동에서 큰 공사를 감독하면서 아랫사람들을 하도 조져대는 통에 그중 하나가 불만을 품고 준공식 전날 발전소 설비에 걸레를 끼워놓아 시운전을 불발시켰다고 한다. 그것 때문에 승진에서 탈락하게 되자 아버지에게 이민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자기도 이민을 온 것이었다. 가진 재산을 모두 팔고 온 우리와는 다르게 그 집은 당시 압구정 현대백화점 지하에 가게도 하나 있었고 아파트도 남겨놓고 왔었다. 그러면서도 현찰로 집과 차를 샀다. 당시 그 동네로 이민온 사람들은 우리를 제외하고 대부분 그렇게 부자였다. 한국에 사업체나 재산을 남겨놓고 순전히 애들 교육 때문에 이민을 온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 치고 자녀들이 모두 공부를 잘한 집은 없었다. 형제자매중 하나는 꼭 공부와 별로 상관이 없는 아이가 있었다.


이유는 하나같이 이민을 오면 한국에서보다 대학에 들어가기 쉽다는 것이었다. 어떤 약삭빠른 사람들은 해외교민 특례입학으로 한국의 명문대를 들어가기도 했다. 그때는 과장을 조금 보태서 자기 이름만 쓸 줄 알면 해외 특례로 한국의 명문대를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자기네들은 그 시험이 매우 어려웠다고 말하고 다닌다.


아저씨는 자기 후배의 아들이 자기 아들보다 더 주목받는 것이 불편했던 것이다. 아저씨의 아들인 H는 나보다 두 살 더 많았는데, 학년을 낮추었기 때문에 나와 학년이 같았다. H는 성격이 서글서글했고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전형적인 부잣집 아들이었다. H와 나는 곧 친해졌고 H는 나를 자주 자기 집에 불러서 밥도 먹이고 같이 게임도 하고 했는데, 그때마다 그 집 아버지는 불편한 얼굴을 했다.  H는 발이 아주 넓었기 때문에 다른 학교의 한국 아이들도 소개해 주었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동네 형'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그들과 자주 어울리기 시작했다.


H덕에 나는 한국 아이들의 세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차도 태워 주고, 주말이면 모여서 먹을 것도 사 먹고 시내도 놀러 나가고, 두세 살 어린 여자애들이 공부 잘하는 오빠라고 부르면서 달라붙는 것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공부하는 시간도 점점 적어졌고 새 학교에는 예전과는 달리 성적에 목숨을 건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예전 학교에서처럼 그렇게 눈에 띄지는 못했다.


니체는 무리 지어 다니는 사람들 중에 제대로 된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맞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사람들과 어울려 봐야 그게 얼마나 가치 없는 것인지 배우게 된다. 무리에 끼어서 밤늦게 놀고 오면 사실 남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모여서 놀 때는 죽을 때까지 평생 친구가 될 것 같고 이 삭막한 서양사회에서 의지할 데라고는 서로밖에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그런 우정은 매우 얄팍하다. 특히 이민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다들 속으로는 "여기서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지 내가 한국에 있었으면 너 따위 인간이랑 알고 지내겠냐" 라는 생각을 조금씩 한다. 이민온 아저씨들이 허드렛일 하는 직장에 다니면서 "한국 같았으면 이런 인도 짱개 새끼들 내가 얼굴 마주칠 일도 없었을 텐데" 하는 것과 비슷하다.


어린 시절에는 많은 경험이 중요하다. 쓴맛을 보는 것은 더 중요하다. 주위를 둘러봤을 때 대체로 인생을 크게 조지는 케이스들은 대학 졸업 때까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모험이라고는 한 번도 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살아온 장남 장녀들이다. 부모의 설교보다 자신이 몸으로 체득한 사실이 더 유익한 법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젊을 때 가능한 한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한다. 나도 가끔씩 그때 한국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그냥 하던 대로 계속 살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그랬다면 더 나중에 더 크게 인생을 말아먹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주기적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지금 내가 이대로 살아도 되는가, 내가 고쳐야 할 점은 무엇인가를 계속 생각해야 발전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세월은 매우 빠르게 지나간다.


이전에 말했듯이 이민자들이 세상을 보는 눈은 더 좁다. 인간관계가 매우 한정적이다 보니 사회생활에서 배우는 것도 별로 없다. 대학을 졸업해도 사회적 지능은 자라지 못한 경우도 많다. 그러다 보니 남에게는 뻔하게 보이는 나의 문제점이 자신에게만 보이지 않기도 한다.


여러 해 전 아는 동생이 한인 학생들을 위한 진로 세미나에 참석해서 몇 마디 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여기서는 나처럼 그냥 웬만한 직장에 취직해서 다니는 것도 성공사례인 것이다. 나는 그다지 타의 모범이 될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서 얼굴 비추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야기가 끝나고 일대일로 대화하는 시간에 한 학생이 나에게 와서 자신이 지금 전산학과 졸업반인데 아직 코딩도 제대로 못하고 취직도 안될 것 같고 해서 고민이라고 말했다.


"전공과목 중에 제일 흥미 있었던 건 무엇이었나요?" 내가 물었다.

"하나도 없었어요, 취직이 잘 된다 해서 전산학과 들어왔는데 정말 적성에 안 맞아요. 학교에서도 한국애들이랑만 다니고 해서 영어도 안 늘고 죽겠어요." 그는 매우 근심스러운 얼굴로 하소연을 했다.


"그럼 컴퓨터에는 흥미가 아예 없는 건가요?"

"아니 제가 맥 프로그래밍에는 좀 흥미가 있긴 해요"

"맥을 가지고 계신가요?"

"아니요."

"그럼 맥으로 프로그래밍 경험은 있나요?"

"아니요."

"그런데 어떻게...?"

"그냥 좀.. 윈도보다는 있어 보여서요."


"그럼 일주일에 몇 시간 정도라도 혼자 독학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래야 되는데 저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으면 혼자는 못 배워서.."

그는 계속 근심스러운 얼굴을 하면서 무리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자기의 말이 얼마나 한심하게 들리는지 알지 못했다. 20년 전의 일이다. 그 학생은 지금 40대 초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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