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1994
한국인들 하면 생각나는 것은 서열문화이다. 어디를 가든 한국 아이들 둘 이상이 모이면 누가 형이냐부터 정리를 한다. 한두 살 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 빠른 년생도 꼬박꼬박 같은 해에 태어난 아이들에게 형 대접을 받았다. 캐나다에서 무슨 빠른 생일 타령이냐 싶기도 하겠지만 그 당시 한인사회에서 위아래를 따지지 않는다는 것은 "형들이 와서 손을 봐줘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것에 굳이 개의치 않아서 누가 내게 형이라고 부르든지 누굴 형이라고 불러야 하던지 신경 쓰지 않았다. 게다가 거기에는 일관성도 없었다. 나는 76년 3월생인데, 76년 1월생인 친구에게 원래대로라면 내가 형이라고 불러야 했지만 애초에 그 아이는 아버지 친구분의 아들로 소개를 받아 생일을 나중에 알게 된 처지라 나중에 형이라고 불러달라 그러기도 뭐 했던 것이다. 그는 나한테는 특별히 말을 놓아도 된다는 아량을 베풀었다. 그러나 나와 동갑인 다른 76년생 아이들에게는 칼같이 형이라고 부를 것을 요구했다. 76년생 셋이 모이면 나는 둘 다 말을 놓았지만 나머지 둘은 형 동생 하는 진풍경이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B는 77년 2월생이었다. 한국에서는 나와 학년이 같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처음부터 형이라고 부르면서 친하게 굴었다. 너는 자라서 큰 인물이 될 사람이다라는 집안 교육을 받고 자란 이유로 근거 없는 자만심이 심한 친구였다. 학교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방금 지나간 여자를 봤느냐며 "형 저 여자애가 날 보고 웃었는데? 어떡하지?" 하곤 했다. 캐나다에서는 그냥 눈 마주치면 살짝 웃어주는 게 예의고, 쟨 나한테도 웃어준다고 해도 그런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여자애들이 모두 다 자기에게 관심 있어한다고 믿는 아이였다.
하루는 내게 전화를 걸어서 사실 한국에서 학년도 같고 하니 이제 나와 말을 놓아도 되지 않겠냐며 친근하게 반말을 하기 시작했다. 뭐 따져보면 맞는 말이니까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이후에도 다른 아이들 앞에서는 계속 날 보고 형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H와 이야기를 하다가 그 얘기가 나오게 되었는데, 평소에는 절대 화 한번 내지 않던 H의 표정이 바뀌더니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가만있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에 본 S는 나에게 다시 깍듯이 존댓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들어 보니 H를 위시한 다른 형들이 B에게 찾아가 그렇게 싸가지없이 굴면 가만 안 두겠다고 엄포를 놓았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에 우리 사이에서는 상당히 큰 사건이었고, 다른 학교 아이들에게까지 소문이 나서 B는 한동안 "요주의 인물"로 찍혔다. 나는 이게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당시에는 학교 당국이나 경찰보다도 "동네 한국인 형들" 이 더 무서운 존재였다. 그중에는 한국서 막 나가던 아이들도 몇 있었기 때문에 언제 와서 린치를 가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누가 맞았다더라 하는 소문만 무성했을 뿐이었다. 밴쿠버로 이민올 정도의 집안이면 불법으로 이민온 사람들이 아닌 이상 다들 교육받은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아이들도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나는 토론토로 이사 온 뒤 밴쿠버 한인들은 정말로 점잖았다는 걸 실감했다. 토론토는 별별 사연 있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내가 편지를 주고받는 친구들 중에는 나보다 일 년 늦게 다른 나라로 간 친구도 있었다. 그 동네도 한인들 노는 모양은 다 비슷한 거 같아 보였다. 영어 못한다고 바보 취급받고, 몇 안 되는 한인 여자애들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 때문에 콧대가 한층 높아져서 어수룩한 애들에게 쓸데없는 희망을 주면서 어장관리를 하고, 백인 여자친구를 사귀겠다는 애초의 포부는 높디높은 현실의 벽에 부딪치고.... 그 친구나 나나 한국에서 오는 편지를 읽는 낙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한국의 친구들은 우리보단 즐겁게 살아가는 것 같았다. 나와 친구는 이러한 현실이 우울했다. "야, 한국에 있는 놈들은 연애도 하고 재밌게 사는 거 같은데 왜 우리는 이딴 외국 시골에 처박혀서 썩어가고 있는 거냐?" 우리는 이를 악물고 여기서 보란 듯 성공해서 한국에 가서 빨간 스포츠카를 장만해서 옆좌석에 백인 여자친구들 태우고 한국에서 우리를 무시했던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아무도 우리를 무시하지 않았지만 하튼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동양 아이들은 주류문화의 아웃사이더라 그랬는지 대부분 흑인문화에 심취해서 보통 팝 음악보다 LL Cool J, Dr. Dre, Naughty by Nature 같은 하드코어 랩 그룹들을 좋아했다. 같잖게 흑인 흉내를 내기도 했다. LA 폭동 (이것도 요새는 Riot이라고 부르면 옳지 않고 Uprising (항쟁)이라고 불러야 한다고들 한다) 영상을 보면 흑인들이 그다지 동양인들을 생각해 주는 거 같지는 않은데도 말이다.
그래서 그런가 아이들이 모이면 다른 운동보다도 농구를 많이 했다. 주말에는 낮에 모여서 농구를 하고, 끝나면 차가 있는 사람들이 애들을 나누어 싣고 어디 단체로 가서 밥을 사 먹고 나서 노래방을 간다던지 시내를 배회한다던지 하는 게 주요 일과였다. 밴쿠버는 공원도 많았기 때문에 돈이 없으면 공원 주차장에 가서 차 속에서 왜 우리는 여자친구가 없을까 같은 대화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운동신경이 전혀 없었으나 아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농구할 때마다 날 불러주는 통에 나도 나중에는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우리들 중 몇몇은 농구를 매우 잘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어린아이들도 점점 참여하기 시작했고 주말 농구시합은 새로 이민온 아이들이 얼굴을 알리는 모임이 되었다. 우리 학교에 들어온 J도 그중 하나였다. 나보다 두 살 어렸지만 키가 훤칠했고 예의도 바른 데다가 인물도 좋았다. J는 너무 예의가 바른 덕에 형들이 패스를 하라면 군말 없이 했다. 그때는 J의 복잡한 가정사를 알지 못했다. J의 부모님은 캐나다에서 이혼을 했고,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지만 J는 동생과 같이 밴쿠버에 남겨졌다. J는 공부를 못하지는 않았지만 사정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 후 일찍 돈을 벌기 시작했다. 동생과 열심히 몇 년 동안 일을 한 J는 제대로 된 직장을 갖게 되었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던 어머니를 다시 초청할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가 한국에서 비행기를 탔을 무렵 J는 그동안의 고생을 마무리하고 드디어 어머니와 같이 오손도손 살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기분이 좋은 J는 저녁에 술을 마셨다. J의 자동차는 집으로 돌아오던 중 낭떠러지에서 떨어졌고 J는 동생과 함께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공항에 도착한 J의 어머니를 마중 나온 건 경찰이었다. 죽음은 가끔 익숙한 골목 모퉁이를 돌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경우가 있다.
J의 친구 K는 우리가 아는 집의 아들이었다. 그 집 아저씨도 우리에게 가게를 판 사람에게서 또 다른 샌드위치 가게를 인수했다. 그 샌드위치 가게도 마찬가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K는 그냥 봐도 얼굴에 불만이 많았고 반항기가 있었지만 딱히 우리 앞에서 문제를 일으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의 말에 따르면 남의 물건에 손을 대기도 했고 도가 넘는 장난을 쳐서 부모님이 학교에 불려 가기도 했다고 한다. 얼마 후 K가 부모님과 같이 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엇나가는 아들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그 집 아버지는 날을 잡고 아들을 두들겨 팼고 아들은 경찰에 신고를 했다. 아버지는 잡혀갔고 K는 그 후 근처의 보호가정에서 살게 되었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신고하는 그런 후레자식이 어디 있느냐며 내가 그런 동생이 있었다면 더 두들겨 팼을 텐데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맞을 때 아주 아팠다면 신고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때려야 그나마 말을 듣는 사람도 있긴 하다. 남의 가정사는 쉽게 뭐라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