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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인생 May 30. 2024

나는 경쟁에 약하다

1994

한국은 경쟁사회라고 알려져 있다. 학교에서도 말이 좋아 친구들이지 다 잠재적 경쟁자들이다. 직장에서는 사방에 밟고 올라가야 될 놈들밖에 없다.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친구가 있다 치자, 그가 나보다 승진이 더 빠르다면? 나보다 월급을 더 받는다면? 그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니다.  나보다 약간 못났어야 마음이 편하다. 우리는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는다고 어렸을 적부터 배운다. 한 친구는 전교 1등이었지만 고등학교 시절 맞은편 아파트에 살던 전교 2등보다 먼저 불을 끈 적이 없다고 했다.  한국에서 이것은 미덕이다.


그런데 경쟁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슷한 사람들끼리 하는 것이다. 아무리 몸비듬을 쳐도 나보다 저 멀리 가 있는 상대를 보면 시기보다는 절망감이 들기 마련이다. 시기 질투도 웬만큼 급이 비슷해야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은 항상 싸움박질로 가득할 것이다. 다행히 사람들은 다들 저마다 잘하는 게 한 가지씩은 있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운동을 잘한다던지, 운동을 못하는 아이는 여자에게 인기가 많다던지, 여자에게 인기가 없는 아이는 집에 돈이 많을 수도 있다. 세상은 가위바위보의 법칙이 지배한다. 모든 걸 가진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나는 누구를 꼭 이겨야겠다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아주 어릴 적을 제외하면 별로 없다. 우선 그렇게 독한 마음을 먹는 것은 여러모로 피곤한 일이다. 경쟁하는 것보다는 남이 경쟁하는 걸 구경하는 것이 훨씬 재미있다. 나는 어쩌다 1등이라도 하면 분에 넘치는 관심을 받는 것이 싫었고 그냥 꾸준히 조용하게 2등 정도 하는 게 나의 바람이었다. 그리고 만년 1등들은 다 그럴만하다 생각이 들 만큼 자기 관리를 잘한다. 나는 그렇게 나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  남을 앞질러서 뭐 어쩔 건가, 피곤하기나 하지.  


그러나 다들 나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다. Y는 강남의 명문고를 졸업하고 이민을 온 특이한 케이스였다. 집안도 부자였고 머리도 좋았다. 이민 와서 편입 목적으로 칼리지를 들어갔는데, 수강하는 과목마다 백점을 받은 전설적인 존재였다. 한국에서도 전교에서 일등을 도맡았다고 한다.  Y의 목표는 미국의 일류대학이었다. Y는 짧은 시간 안에 친구들을 많이 만들었다. 사람들을 집에 불러다 밥도 먹이고 만화책도 빌려주고 그러면서 인심을 많이 샀다.  Y의 집은 해변이 보이는 웨스트 밴쿠버 산자락에 있는 저택이었다. 집에는 비싸 보이는 수많은 표구된 그림들이 벽에 걸려있는 대신에 바닥에 놓여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져 있었다. Y의 어머니는 조용하신 분이었는데 놀러 갈 때마다 한식당에 온 것처럼 진수성찬을 차려주셔서 먹는 우리가 미안할 정도였다.  Y의 아버지는 사업가라고 들었다.


그는 농구를 아주 좋아해서 아이들이 농구하러 모이는 곳에는 빠지지 않고 나왔다. 웬만한 농구경기는 거의 다 녹화를 했고 그런 애들 특유의 설명충 기질로 "조던이 어제 왼쪽으로 크로스오버를 할 때 밟았던 스텝은 이러이러한 것이고..." 식으로 별거 아닌 것에도 아무도 원하지 않은 설명을 아주 재미없게 길게 했다. 그는 전문가처럼 이야기하는걸 좋아헀다. 아이들은 Y에게 공부 잘하는 애가 한 명 더 있다며 날 소개해 주었고 Y와 나는 이내 친해지게 되었다.


 Y는 확실히 나보다 명석했다. 뭔가를 배우는 능력은 나보다 월등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냥 한번 쓱 보고도 다 기억하고 이해하는 걸 옆에서 보면 경이로웠다. 그러나 세상은 가위바위보의 법칙이 지배한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흔히 그렇듯 Y는 토론을 좋아했는데, 그의 주장들의 주된 근거는 "어른들께서 그렇게 말한다" 혹은 "법이 그렇다"였다. 문학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그는 학원 선생처럼 "이 소설에서 화자의 의도는..." 하고 장황하게 설명했다.  내가 "작가한테 물어본 것도 아닌데 그거 그냥 선생들이 그렇게 해석하는 게 아닐까? 작가는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던 게 아닐까?" 하면 그게 아니라며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부터 그런 것"에 의구심을 품는 것을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내가 "여자가 남자가 될 수도 있는 거 아니냐" 혹은 "나중에 우리는 기계와 결혼할 수도 있지 않냐" 같은 말을 할 때마다 한심한 듯이 날 쳐다보았다.  하긴 내가 본 대부분의 한국 수재들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외워야 할 정보가 많고 준비해야 할 시험이 많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일부러 Y를 따돌리고 농구를 하기 시작했다. "아 걔는... 애는 참 좋은데 조금..." 하고 사람들은 얼버무렸다.

사람들이 Y를 피하는 이유는 그가 승부에 광적으로 집착했기 때문이었다. 공을 어쩌다 뺏기기라도 하면 경기 내내 그 아이를 원수처럼 죽어라 쫓아다녔다. Y는 누가 자기보다 농구를 잘한다는 말을 듣기 싫어했다.  그런 아이가 있으면 일대일을 신청하고 이겨야 직성이 풀렸다. 반면에 우리는 재미로 농구를 하는 거였지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니었다.  사실 우리가 잘해봐야 고등학교 농구선수들 가방 들어줄 실력도 안되는데 도토리들끼리 키를 재서 뭐 어쩔 것인가.


나이가 아래인 아이들에게는 농구를 똑바로 안 한다며 화를 내기도 했다. 
한 번은 짜증 나게 수비하는 아이의 얼굴을 주먹으로 갈긴 적도 있었다. 형한테 버릇없이 까불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문화와 습관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 한국 사람들을 아무리 서양 선진국에 갖다 놓아도 그들은 곧 한두 살 차이로 아랫사람을 찍어 누르려 들고 파벌을 만들고 명문대 타령을 한다. 마음속 깊은 곳에 각인된 습성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은연중에 Y는 자신의 명석함을 살짝살짝 내비치는 걸 좋아했고 사람들은 곧 그런 Y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어쩌다 논쟁이 일어나면 Y는 절대로 적당한 선에서 수긍하지 않고 계속 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물론 나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우리 둘은 자주 부딪혔고 그러면 사람들이 중간에  말리기도 했다. 내가 틀린 적도 있었지만 명백하게 Y의 논리가 딸리는 경우에도 Y는 절대로 승복하려 들지 않았다. 어쩌다 말문이 막히면 Y는 하루종일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많은 한국사람들에게 토론이란 검투사 시합 같이 한쪽이 개처럼 처발려야 통쾌한 것이다. 한국에서 유행했던 끝장토론이라는 단어도 그 저의에는 말싸움해서 누가 이기나 보자라는 뜻이다. 서로 자기는 절대 틀릴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 의견을 바꿀 생각은 애초에 없다. 그런 건 토론이 아니다.


H의 말로는 나의 말투가 Y의 신경을 잘 건드리는 것 같다고 했다. Y는 뭐든지 남들보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으니 그냥 모른 척하라는 것이었다. 머리도 좋고 운동도 잘하고 집에 돈도 많은데 왜 저런 이상한 열등감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키가 작고 못생겨서 그런 게 아닐까" 내가 대답했다. Y는 키가 170이 되지 않았고 윤종신을 많이 닮았었다. 

"너는 그렇게 아픈 데를 꼭 집어서 얘기하는 재주가 있어." H가 헛웃음을 지었다. 사실 나는 엄마를 닮아서 남이 입에 올리기 어려운 말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할 수 있었다. 내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Y 자신도 자기 인물이 별로지만 자신은 개의치 않는다고 여러 번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 소리를 여러 번씩 한다면 사실은 많이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다.


그 후 Y는 토론토 대학 견학 차 토론토에 와서 내 자취방에서 며칠 묵고 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토론토대는 안전빵으로 지원한 거고 자기의 목표는 미국 명문대라는 걸 나에게 여러 번 강조했다. 그런데 안전빵으로 지원한 대학을 뭐 볼 게 있다고 견학까지 왔을까.


Y는 미국 중부의 명문대 전자공학과에 들어갔고 졸업 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보다 연봉도 훨씬 높았고 최첨단을 달리는 곳이었지만 그는 왠지 행복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를 보고 개발직도 아니고 QA는 좀 급이 떨어지지 않냐는 충고를 했다. 난 여기서 이 정도 벌면서 살면 됐어, 개발은 집에서 취미로 하면 되지. 하는 말에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나는 취미로 철학 석사과정을 시작했고 그는 그런 건 왜 하느냐며 젊을 때 시간을 알차게 보내야 한다고 훈계를 했다. 그럼 너도 싫은 회사에 붙어있지 말고 좋은 데로 이직을 하렴. 그는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는 메신저로 주로 대화를 했고 하루는 자기도 스타트업을 할까 한다면서 사업계획서를 보내면서 평을 부탁했다. 내가 보기에는 어디서 본 것들을 이것저것 짜집기 한 것 같았다. 창의성이 부족한 거 같아서 보완이 필요하다고 코멘트를 많이 달아 주었는데, 그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 이야기는 다시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미국 명문 법대에 입학했다. 명석한 그에게 법대 입학은 쉬운 일이었다. 졸업 후 그는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공부로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쉽게 했다. 서울에서 1-2위를 다투는 로펌에 취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도 그만두었다. 그는 무슨 일이든 싫증을 내고 그만두길 자주 했다. 집에 돈이 많았기 때문에 싫은 직장에 매여 있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언젠가 한국에 갔을 때 연락이 닿아서 거의 10년 만에 얼굴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때 새 회사로 막 이직한 상황이었는데, 그걸 알고 있던 그는 거기는 이제 지는 회사 아니냐, 거기 뭐 하러 들어갔냐 다른 데 가지 하면서 수선을 떨었다. 나는 여기 망하면 딴 데 가면 되지. 괜찮아. 하고 대답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는 자기가 모바일 앱을 만들어서 스타트업을 할 생각이 있는데 계획서 좀 봐 달라며 자기 사업 구상 이야기를 두 시간 씩이나 해 댔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그리 변한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앱 아이디어는 예전처럼 엉망이었다. 나는 짚히는 대로 단점을 하나하나 이야기하며 이런 건 좀 힘들 것 같다고 말해 주었고 그는 별 대답이 없었다. 


우리는 신사역 근처에 있었고 나는 신논현역으로 가야 했다. 차를 끌고 나온 그를 보고 혹시 신논현역까지 태워줄 수 있니? 하고 묻자 그는 반대방향으로 가는 길이라며 난색을 표했다. 알았다고 하고 나는 신논현 방향으로 걸어갔다.


아버지는 뉴스에서 재벌집 자식들이 마약을 하고 재산다툼을 할 때마다 나를 보고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냐, 애비가 돈이 없어서 너는 저렇게 싸우지 않아도 되지 않니. 하고 말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돈이 없어도 사고는 쳐요.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어쩌면 아버지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부족한 게 없으면 절박한 것도 없고, 절박한 게 없으면 뭘 이룰 수가  없다. 머리가 좋은 것과 업적을 만드는 것은 아주 다른 이야기다. 나는 돈이 없었기에 싫어도 회사를 그만둘 수 없었고 그래서 경력이 생겼다. 성공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기에 수중에 얼마 없는 돈으로 돈 버는 데는 쓸모가 없는 철학을 공부했다.  인생은 매우 짧고 부자들도 늙으면 요양원에서 남들과 똑같이 기저귀를 갈며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하루를 보낸다. 그렇기에 사람은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야 한다. 나는 그래서 Y의 은근한 비아냥도 유리수조 안의 파충류를 볼 때처럼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후에 내가 만났던 한국 사람들 중에는 Y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별 의미 없는 말도 경쟁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은연중에 "너는 이건 없지" 하면서 자기 자랑을 하곤 한다. "너 얼마 버니" 물어보고 "나도 그정도는 돼" 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객관적으로도 자기보다 여러 모로 부족한 나에게 Y는 왜 자신의 우월감을 그렇게 증명하려고 들었을까. 나에게 사업계획서니 에세이니를 보여줄 때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하고 자랑하려는 의도가 약간은 있었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그러나 나는 당시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고 그냥 이건 말이 안 돼. 하면서 빨간 줄을 죽죽 그어서 돌려주었을 뿐이다. 


그는 요새 매일 페이스북에서 시사이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전문가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옛날처럼 설명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사람은 웬만해서 변하지 않는다. 옛날과 마찬가지로 그의 글에 호응하는 사람도 매우 적지만 그는 꾸준히 글을 올린다. 여기저기 투자를 한다는데 뚜렷한 직업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명석한 두뇌로 그렇게 악착같이 살지 않았어도 원래 집에 돈이 많았으니 지금과 별다르지 않은 삶을 살지 않았을까 싶다. 가성비로 따지면 Y보다 게으른 삶을 선택한 내가 현명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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