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
부모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혼자 생활하면서 산다는 것은 모든 청소년이라면 당연히 꿈꾸는 일이다. 부모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다. 그냥 정상인이라면 십몇년동안 부모와 같이 살았으면 이젠 좀 따로 살고 싶은 법이다.
하지만 그만한 자유에는 책임도 따른다. 부모가 없으면 자신이 모든 걸 알아서 해야 한다. 늦잠을 자건 이를 닦지 않고 잠에 들건 끼니마다 콜라를 먹건 모두 자유고 옆에서 잔소리할 사람은 없다. 그러한 행동에 대한 청구서는 먼 훗날에 올 것이고 그때의 일은 미래의 내가 처리하면 되기 때문에 지금의 나는 그냥 즐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행동에 책임이 따른다는 진리는 18살의 청소년이 이해하기에는 어렵다. 그러한 이유로 내 주변에는 놀기만 하다가 학교에서 제적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토론토 대학의 입장은 "웬만하면 다 들어와, 대신에 2학년 끝날 때까지 성적이 신통찮음 나가라"였다. 토론토 대학에 입학한 건 그다지 자랑할게 못돼도 졸업한 건 자랑할 만한 일이었다.
나도 어렴풋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살면 앞으로의 생활은 순탄치 않으리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편하게 사는 것이 왠지 불편했다. 나는 몸이 고생해야 그날 저녁 잠자리에 들면서 "오늘도 헛되이 보내지 않았구나" 하고 안심하게 된다. 세상은 항상 우리에게 불행을 주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즐거운 날들이 한동안 지속되면 그만큼 나중에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불행이 닥치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오는가?" 하고 억울해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건 어리석은 질문이다. 세상은 항상 불행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고, 별 일 없이 하루를 마쳤다면 그것이야말로 운이 좋았던 것이다. 행복해야 할 권리라는건 자연법칙 아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부모님은 다른 사람들처럼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준다던가 하는 적은 거의 없었다. 나에게 닥친 문제는 항상 내가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었고 어쩌다가 "그래가지고 되겠냐"라는 말만 들었을 뿐 뭘 나서서 보여 준 적은 없었다. 혼자 살게 되면서부터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은 더 늘어났고 그때마다 나는 내 식대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물론 많은 경우 내 판단은 틀렸다. 18살 소년의 상황판단력은 대부분 형편없다. 하지만 그런 게 인생이다. 틀리고 실패해야 성장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여건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90년대 중반의 캐나다 사회는 물정 모르는 어린애가 혼자 살 수 있을 만큼 사람들이 친절했고 웬만하면 나의 말을 다 믿어 주었다. 친분이 없어도 도와주는 사람들도 많았고 양보도 많이 받았다. 실수를 해도 사과를 하면 대개 너그러이 봐주곤 했다. 서양 사람들이 독립심이 강한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운동경기를 하는 것처럼 페어플레이 정신으로 인생을 살았다.
한국에서는 아이들이 나약하고 자립심이 없다는 이야기가 수십 년 전부터 있었다. 한국인들은 "서른 살이면 아직 애기지" 하면서 굳이 안 해줘도 되는 것들을 성인인 자녀들에게 베풀고 만족감을 얻는다. 내가 아는 어떤 교포 아줌마는 오빠만 여럿인 막내딸로 태어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딸의 옷을 항상 직접 골랐고, 어느 날 딸이 친구와 같이 놀러 나가서 본인의 옷을 직접 사 오자 역정을 냈다. 그 이후로 그 아줌마는 가게에서 물건을 혼자 고르지 못했다. 졸업하자마자 결혼한 그녀는 항상 뭔가를 사야 할 때면 남편을 대동했다. 급히 살 물건이 있다고 해서 월마트에 같이 간 적이 있었는데, 여행가방 하나만 사면 되는데 땀을 흘리며 울상을 짓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굉장히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난 이런 거 혼자 사본적이 없어." 그녀의 나이는 당시 마흔이 조금 넘었었고 서울의 일류대학을 나와 중학교 선생으로 일한 경력도 있었다.
내 경험으로 봤을 때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사람이 세상과 부딪히며 배우기에는 한국 사회는 상당히 개떡 같은 곳이다. 한 번의 실패도 주위의 손가락질과 막대한 금전적 손해의 리스크가 있다. 그리고 만만하게 보이면 도와주려는 사람들 보다는 껍질을 벗겨먹으려는 사람들이 더 많다. 자식이 그렇게 되는 걸 보느니 차라리 마흔 넘어도 가방 하나 혼자 못 사는 인간으로 만드는 쪽이 부모에게는 더 편할지도 모른다.
학기가 시작하면서 내 나름대로 생활규칙을 만들었다. 나는 무인도의 로빈슨크루소였다. 돈도 모자라고, 친구도 없고, 언제 폭풍우가 몰아닥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우선 수업은 빼먹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토론토대학은 한국처럼 출석체크가 없다. 학기 중에는 한 번도 보이지 않다가 기말고사장에 나타는 학생들도 있었다. 교수들도 수업에 참석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혼자 교과서 보고 공부해서 점수를 받을 수 있음 그렇게 하라는 식이었다. 기숙사의 신입생들은 아침 수업을 자주 빼먹었다. 어제 늦게까지 노느라고 졸립고 교수가 하는 얘기는 교과서에 어차피 다 쓰여있을 테니까.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생각하고 처음에는 수업을 꼬박꼬박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교수의 말을 딱 절반정도밖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수업은 10분에 시작해서 00분에 끝났는데, 지루해서 시계를 보면 항상 35분경이었다. 45분 정도가 되면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고 수업이 끝나면 머릿속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나는 고등학교에서 선생들이 나에게 말을 천천히 또박또박 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나의 영어실력은 토플 듣기가 만점이건 뭐건 대학 수업을 듣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매주 교수의 강의는 세 시간, 조교의 수업은 한 시간이었다. 조교의 시간에는 주로 문제풀이나 실험을 했다. 조교들은 모두 대학원생이었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때서야 지금까지 나의 선생들은 모두 캐나다에서 태어난 백인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도 악센트나 중국 악센트는 알아듣기가 너무 어려웠고 온 신경을 집중하며 무슨 말인가를 이해하려고 하다 보면 배가 고팠고 졸렸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 나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그래, 아침에 괜히 일찍 일어나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수업을 들으면서 시간을 죽이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교과서를 더 읽자. 그렇게 나는 아침 수업을 빼먹기 시작했다. 조교의 수업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한 억양의 영어를 이해하느라 힘 빼느니 차라리 교과서의 문제를 혼자 더 풀어보자. 그러나 교과서를 더 공부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고 교과서가 어렵기 때문에 교수와 조교가 그나마 쉽게 설명을 해주는 게 수업의 목적이었다. 대학에서는 혼자서 무작정 교과서를 읽는다고 이해가 될 수준의 지식을 가르치지 않는다. 85점을 기대하고 받아본 시험지에는 65점이라고 채점되어 있었다. 고등학교에서는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점수였다. 대부분의 계획이 그렇듯 나의 다짐도 처음에는 그럴싸하다가 이런저런 핑계를 만들어서 흐지부지되는 전형적인 패턴을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