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큐레이션이 아닌 방식으로 음악을 말하기
원문: <더포인트 매거진> 일부 번역
https://thepointmag.com/dialogue/interview-simon-reynolds/
벤 제프리: 2005년 출간된 <찢어버려, 그리고 다시 시작해>(Rip It Up and Start Again) 서문에 당신은 이렇게 썼습니다. “록 비평가로서, 어느 나이에 이르렀을 때, 당신은 자신이 이 음악이란 것에 투여한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에너지가 전부, 정말로 아주 기민한 움직임이었는지 의아해지기 시작한다.” 이 책—당신이 처음으로 대중음악(pop)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영감을 준 포스트펑크 신의 연대기—또한 깊은 의심으로 끝을 맺습니다. “음악에서 답을 찾던 건 전부 (…) 그저 에너지 낭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그 에너지는 ‘가치 있는’ 뭔가에 쓸 수 있었고 썼어야 했던 것일까?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당신이 <레트로 마니아>에서 그런 의심으로 되돌아가지는 않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같은 종류의 생각이 잠복된 형태로, 전체를 관통해 흐르고 있다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생각의 일부는 개인적인 것이지만 또한 음악 글쓰기란 작업이 성취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더 일반적인 우려를 아우르는 근심이 깔려 있습니다. 이런 인상이 어느 정도 맞다고 보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사이먼 레이놀즈: 질문에 대한 답변을 에둘러 하겠습니다.
록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시간 낭비인지 아니면 에너지의 전환인지…. 그것은 나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일들과 어떤 나이가 되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아마도 음악 비평의 역할과 목적, 그런 비평을 행하는 올바른 방법에 관해 2000년대에 있었던 논쟁에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로키즘(rockism) 논쟁을 말하는 겁니다. 대부분 2000년대 초반에 있었던 일입니다(그래서 아마 당신은 놓쳤을 겁니다). 하지만 그 논쟁은 블로그와 ILM(I Love Music, 인터넷 대중음악 포럼) 같은 곳으로부터 생겨나 <뉴욕 타임스>와 <뉴요커> 페이지를 통해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이러한 논쟁의 밑바탕에는, 내 생각에 ‘중요성’(importance), ‘특별한 의미’(significance), ‘관련성’(relevance) 같은 개념에 대한 믿음의 상실, 그리고 이러한 개념들을 사용하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하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사람들은 음악의 가치를 평가하는 이러한 지표들이 여전히 유지될 수 있는지 알려고 애썼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개념을, 그런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주장에 흔히 따라 붙는 허세와 허풍과 함께, 몽땅 버리는 편이 낫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밖에 다양한 접근법이 ‘큰 주장’(big claims) 접근법을 대체했지만, 여전히 진지함이라는 아우라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널리 퍼진 한 가지 접근법은 형식주의로, 세심하고 많은 것들을 살피지만 크고 넓은(여기서 넓다는 건 일반 대중이 흥미를 느끼리라 가정하는 겁니다) 의미를 주장하는 건 회피하며 면밀하게 서술하는 방식입니다. 이 접근법을 사용하는 비평가는 음악작품을 즐거움의 한 단위로서, 또는 장르라는 용어 안에서 성공이나 성취 관점에서 논의하겠죠. 그러나 그 용어 자체는 판단하지 않거나, 어떤 음악이 가치 있고 그 음악의 목적은 무엇인지에 대한 더 큰 논쟁으로 나아가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은 모든 음악 장르를 무시해서는 안 되고, 또는 특히 한 장르에 대해 지나치게 편파적이고 열광해서도 안 됩니다. 특정 장르를 더 좋아할 수 있지만, 그 선호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가정하지 않습니다. 가능한 많은 장르의 형식적인 성취와 경합하는 즐거움에 열려 있는 게 이상적입니다. 당신은 1인칭 복수형, 로키즘 담론의 ‘우리’를 피하고, (존재한 적도, 신화였던 적도 없었다고 점차 느끼는) 단일문화의 붕괴를 긍정적인 발전으로 봅니다.
이러한 부류의, 두루 관심을 보이는 잡식성 리스너 모델은 더 공식적이고 ‘책임감 있는’ 양식으로 변모합니다. 때때로 ‘제너럴리즘’으로 알려진 양식입니다. 전문가적인 오픈마인드, 이것은 신문 지면에서 대중음악을 이야기하는 주요 리뷰어라면 갖춰야 할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약한 로키즘, 소리를 죽인 로키즘입니다. 중요성은 여전히 희미하고 다급하지 않은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믿음과 당파성의 근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적어도 논쟁에서 벗어나야 하는 제너럴리스트 리뷰어에게는 그렇습니다). 이 양식은 좋은 판단력을 지녔지만 재단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음악이 (장르에 대한 호불호의 측면에서 편견을 갖는 신봉자로 추정되는) 특정 청중/취향시장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에 대한 약간의 유사-사회학적인 추정이 흔히 있습니다.
'중요하다'는 고루하고 더부룩한 말이지만, 이 말에 담긴 기본적인 생각이란 ‘그저 유희나 엔터테인먼트 이상의 무언가가 여기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들(중요성, 특별한 의미, 관련성)은 시급함과 결과성(consequentiality)의 감각을 만들어내는 기능을 합니다. 이건 수사적인 도구입니다. 이런 종류의 말들과 이런 부류의 논쟁은 비평가가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a.) 당신은 이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b.) 당신은 이 다른 것들을 (사소하고 헛되고 주어진 지표에 맞서 실패했다며) 무시해야 한다고요.
음악에 귀속될 수 있는 속성으로서 '중요성'은 느리고 꾸준히 사라졌고, 음악 글쓰기에서 수사적이고 권고하는 힘의 출혈이 생겨났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무언가를 하도록/하지 못하도록 설득하려고 다급하게 애쓴다는 감각을 주는 글은 정말 드뭅니다. 확실히, 글을 쓰는 사람들은 똑똑하고 스타일리시하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확하다(묘사, 또는 사물들의 도식에 음악을 위치 짓는 작업, 아니면 음악사의 관점에서)는 인상을 주고 싶어합니다. 당신은 무언가가 '흥미롭다'는 감각을 얻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느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그리고 그걸 무시한다면 결정적인 무언가를 놓치게 될 거라는 믿음의 감각은 드뭅니다.
당신은 <레트로 마니아>에 대해 쓴 에세이에서 문화적 무중력 상태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주위의 수많은 패스티시(pastiche) 음악에 대한 느낌처럼 보입니다: 메타음악, 다른 음악에 관한 음악, 역사와 사회가 음악을 품었던 시기의 음악을 성실하게 복제한 음악 말입니다. 광범위한 문화적 조건으로서 '레트로 마니아'는 지금껏 유지되어온 기반을 침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음악이 그냥-음악(just-music)—풍요와 선택이 넘쳐흐르는 풍경 속에서 유희와 즐거움의 단위들—이 되고 있다면, 진리의 담론이자 윤리적 책임이 있는 판단 양식으로서의 비평은 더 이상 말이 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