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ch House - Myth
에어컨 바람에서는 쿰쿰하고 축축한 모래 냄새가 난다. 여름 냄새다. 해변의 냄새. 청소할 겨를도 없이 갑작스레 후덥지근해진 날씨에, 올해 처음 켠 에어컨일지도 모른다. 5월 말의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비치 하우스의 앨범 <블룸>을 처음 들었다. 까만 천장에 물방울이 맺혀 금방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커버 이미지와 그런 이미지에 딱 어울리는 첫 곡이었다. 마침 시청역을 지나고 있었을 때였다. 인파가 빠져나가고 귓가에서 몽글몽글 부풀어오르던 물방울이 터진다. 나는 해변을 상상하려 애쓰지만, 내게는 떠오르는 바다의 기억이 없다. 어딘가의 바다를 생각하며 땀이 날 듯 말 듯한 발걸음으로 와우교를 건너던 시절이 떠오른다. 질식할 것 같은 녹색의 가로수들, 내 옆을 스치는 낡은 자전거. 20대 초반의 여름, 나는 홍촌의 거리에 있다.
누군가에게 청춘은 뜨거운 여름의 유의어이며, 낭만과 사랑과 객기와 몸을 섞는 시기라지만,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Nothing happened to me”라고 외치던,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어느 영국 인디팝 밴드의 노래 가사가 내 삶을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지독한 저주라도 걸린 듯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영원히 정지된 시간의 덫에 걸린 듯했다. 훗날 그 덫을 만든 건 나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 깨달음에 이르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다.
그때 내 삶은 음악으로 치면 단조로운 드론이 깔린 앰비언트 습작, 영화로 치면 잘해봤자 필름에 스크래치가 가득한, 어설프게 실험영화를 흉내 내는 학생영화였을 거다. 서울 변두리에서 통학하며 모대학 사회과학대에 다니는 학생. 자존감이 낮고 게으르고 무기력했다. 사건은 움직여야 생긴다. 일은 일을 해야 일어난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이 시기에 내가 유일하게 했던 건, 음악을 듣는 일, 영화를 보는 일,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몇 번의 여름 동안, 나는 와우교를 건너 화실에 갔다. 화실은 홍촌에 있었다. 입시미술학원 거리의 끝자락, 가구 공방 3층에 위치해 있는 이 화실은 대학교 1학년 겨울, 방학을 앞두고 학생회관에 붙어 있던 일반인 대상 취미미술 전단지를 발견한 대학 친구가 같이 다니자며 알려준 곳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마음을 바꿔 재즈피아노학원에 등록했고, 화실에 등록한 건 나 혼자였다.
취미미술을 가르친다는 화실에는 건축학 전공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드로잉 기초를 쌓으려는 같은 학교 학부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그들 또한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들은 겨울 내내 선을 긋고 소묘 연습을 하더니 여름에는 보이지 않았다. 여름의 화실은 또 다른 학부생들로 채워졌다. 달리, 목표가 없었던 나에게 미술은 온전히 취미였다. 그래서 그해 여름에도 화실을 찾을 수 있었다. 학기 중에 모았던 알바비는 수강료가 되었다. 사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림을 그리는 건 어린 시절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미술시간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고, 그림을 그리는 삶은 내 은밀한 꿈이었다. 그러나 나는 쓸데없이 시험을 잘 봤고, 미대 입시를 준비할 만큼의 재능이 없었으며, 집안의 경제력은 좋지 않았다. 나는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뒤늦게, 그 시기를 다시 살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것을 한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 필사적으로, 내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기억과 싸우고 있었다. 화실의 나는 명백히, 현재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았다.
20대 초반의 어떤 시간들은 그렇게 흘러간다. 누군가는 음악을 들으며 누군가는 기타를 치며 누군가는 글을 쓰며 심지어 누군가는 연애를 하면서도 과거의 시간을 다시 산다. 기억들이 겹쳐지고 또 겹쳐져 끝내 투명해지는 동안, 현재는 밀려난다. 마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다. 그것에 몰두하는 일을 제외하고. 그렇게 어떤 아이들은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시간 속에서, 자꾸만 밀려드는 과거를 벗어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며 어른이 된다.
소묘를 배우고 유화를 그리고 목탄으로 손을 까맣게 물들이고 화선지를 앞에 두고 먹을 갈면서 방학마다 화실에 다녔고, 몇 번의 방학을 보낸 후 나는 졸업을 맞았다. 나는 화실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아무것도 꿈꾸지 않았고 그 무엇도 원한다고 말한 적 없으니까. 나는 과거의 빚을 갚느라 현재를 지나쳤고, 내 청춘이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건 분명 사실이었다. 하지만 끝난 건 봄이었고 여름은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