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라게 May 18. 2021

혼자서 맞이한 결혼기념일

혼자살기 닷새째


2017. 02. 22

오늘은 우리 부부의 결혼 19주년 기념일이다. 결혼기념일에 아무 행사 없이 이렇게 혼자서 보내는 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 보통은 주말에 미리 외식을 하거나 당일 저녁에 술을 함께 마셨고 가끔은 특별히 맘먹고 예매한 비싼 공연을 함께 보기도 했다. 

결혼기념일이 대단히 반가운 날로 인식되지는 않았지만 부부가 함께 축하해야 하는 날인 건 분명하기에 당연히 결혼기념일 행사는 20주년, 30주년 계속 될 거라 믿었다. 

이제야 깨닫는 교훈은 인생에 당연한 건 없다는 사실이다. 평범해 보이는 일상도 들여다보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수많은 노력과 수고가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1998년, 그러니까 IMF라는 경제 사태로 나라 전체가 위기였던 그 해 2월에 우리 부부는 연애 5개월 만에 뭐가 그리 급했는지 결혼식을 올렸다. 치솟은 환율 때문에 해외여행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신혼여행은 제주도로 떠나야했다. 결혼 준비 기간이 워낙 짧아 모든 게 정신없이 번갯불에 콩 볶듯이 진행되었다. 작은 전셋집을 구하고 예식장을 예약하고 가구와 전자제품을 고르고 종로에 가서 간소한 예물을 맞추었다. 바쁜 와중에도 그 당시 유행이던 야외촬영까지 감행했으니 지금 생각해면 가상한 노력에 웃음이 난다. 경복궁에서 야외 촬영하던 2월 중순은 꽃샘추위가 기승이라 유난히 추웠다. 얇은 드레스 하나만 입고 뼛속까지 사무치는 바람을 견디며 촬영기사가 시키는 대로 얼굴에 미소를 띠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비싼 돈을 지불하고 추위를 견디며 찍은 그 날의 사진들은 두꺼운 앨범과 한 쪽 벽 전체를 가릴만한 거대한 액자로 탄생했지만 곧 촌스럽다는 걸 깨닫고는 구석에 처박아두고 다시는 꺼내지도 않게 되었다. 결혼은 처음이라 뭘 몰라서 그랬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그 해에 많이 일어나긴 했다.

그렇게 우리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얼버무려진 채 얼렁뚱땅 부부가 되었고 20년의 세월을 그럭저럭 함께 살았다. 오랜 세월을 함께 살다보면 어느 부부에게나 한 번쯤 큰 위기가 닥친다. 우리 부부도 작년 말 전혀 예상하지 못한 큰 갈등을 겪었고 나는 혼자살기를 선언하고 집을 나오게 되었다. 결혼 생활 전체가 흔들리고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그 동안 바보처럼 살았다는 자책감이 밀려와 고통스러웠다. 자존감은 바닥이었고 한 달간 잠을 거의 못자서 죽을 것 같았다. 결국 신경정신과를 찾았고 항우울제 처방을 받았다. 


‘혼자살기’는 내가 다시 살기 위해서 고심 끝에 내린 마지막 선택이었다. 세상과 가정으로부터 일단 떠나고 싶었다. 내게 필요한 건 휴식이었고 치유와 회복을 위한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었다. 오늘로 혼자살기 5일째다. 낯선 곳에서 혼자 지내는 생활에 나는 잘 적응하고 있고 마음이 한결 편안하다. 잠도 푹 잘 자고 밥도 잘 먹는다. 나는 요즘 앞으로의 1년을 어떻게 멋지게 보낼지에 대한 구상으로 가슴이 벅차다.     

결혼 19주년 기념일인 오늘, 나는 강원도에서 양념이 들어있는 인스턴트 국물 떡볶이로 대충 

끼니를 해결했고 남편은 서울 아파트에서 김치찌개를 끓여 혼자 저녁을 먹었다고 했다. 딸이랑 같이 먹으려고 찌개를 많이 끓였는데 딸이 저녁을 먹고 들어오자 남기기도 애매해서 그냥 다 먹어 치웠다고 했다. 지금은 배가 터질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내가 옆에 있었으면 남편이 과식을 못하도록 분명 말렸을 테지만 그에겐 지금 아내가 없다. 전화로 잘 자라는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그의 목소리가 힘없이 떨린다. 그와 나 모두에게 혼자서 보내는 결혼기념일은 낯설고 울적했다.           

작가의 이전글 졸혼이 뭐길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