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사랑은 대단하다는 걸 친정 엄마와 출산을 통해 다시 느꼈다. 해외에서 산후조리를 못하니 친정 엄마가 최대 3개월을 머물며 나와 내 가족을 돌봐주었다. 첫째 때도 둘째 때도. 그것뿐만인가? 모던한 사회에 산후조리는 어떨까 궁금해서 한국에서 산후조리 자격증까지 취득하고 왔다. 난 정말 행운아이다.
(독일에는 Wochenbett 라고 산후조리라는 컨셉이 존재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산후조리가 없다. 아기 태어나자 마자 축하한다고 집에 와 저녁을 얻어 먹고, 생후 0개월도 아이를 데리고 나와 쇼핑하고 돌아다니고 파티도 가고 할 거 다 한다.)
엄마가 오는 그 2월 말만 손꼽아 기다렸다. 임신 9개월 동안 응급실에 3번 실려갈 정도로 입덧은 너무 심했다. 프랑스 산부인과 의사에 따르면 타지에서 임신한 여자들의 입덧이 더 심한 경향이 있으며 스트레스가 주원인이라고 했다. 그렇다. 독일이라는 나라에서 임신했으면 달랐을 수도 있다. 프랑스어 공부, 첫째 적응 도움, 내 미래 걱정, 프랑스에서 삶 적응등이란 많은 숙제들이 있는 와중에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해야한다니...
드디어 엄마가 왔다. 그리고 엄마는 나에게 큰 힘이 돼주었다. 첫째 어린이집은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데, 그 짧은 길을 갈 때도 토할 까봐 봉지를 싸들고 다니고 쓰러질까 봐 무서웠는 데 엄마가 와서 마음이 안정되었다. 프랑스어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 와서 슈퍼마켓에서 장도 봐주고 놀이터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첫째를 보호해 주었다.
엄마는 임신 39주 출산 예정일에 맞춰서 왔지만 가진통만 하루하루 심해질 뿐 아이는 나오지 않았다. 한국이나 독일 같으면 '바로 수술합시다'라고 할 텐데, 그 어느 누구도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도와주지 않았다. 그놈의 이슬이 뭔지 이슬을 비추지도 않았고 진통만 심해졌다 없어지니 우울해져 가기만 했다. 프랑스 출산 예정일인 임신 40주에 아이가 나왔다. 출산은 험난했고 회복실에서 6시간을 있다가 정신을 차리니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엄마였다. 엄마와 나는 울었다.
둘째의 0-2개월은 내 몸이 회복하지 못할 것 같아 엄마와 나는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엄마는 '한국 같으면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며 고칠 텐데'라고 했고 그럼 난 '여기는 한국이 아닌데 어떻게.' 라며 화를 냈다. 근데 엄마 말이 맞았다. 난 밑이 빠지는 증상을 프랑스 산부인과 의사들에게 하소연했지만 그들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했다. 나중에 한국에 가서 알게 된 사실인데 이것은 실제 '골반장기탈출증'의 초기 증상이었던 것이다.
둘째가 2-3개월이 되는 때, 우리는 파리 근교 집으로 이사를 갔다. 아파트에서 집으로 이사 간다는 것은 참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냥 짐을 싸는 것뿐만 아니라 집의 공사 마무리 상태도 체크하러 다녀야 하고, 이삿짐을 어느 구역에 둥지도 진두지휘를 해야 한다. 남편이 다 해야 할 일 같지만 남편은 의외로 나한테 의지를 많이 한다. 하하.
그렇게 3개월 동안 엄마가 고생을 많이 한 것 같고 너무 미안했다. 나를 낳고 그동안 나를 위해 많은 것들을 해주셨는 데, 다 큰 성인이 돼서도 이렇게 기대야 한다니. 게다가 출산을 하고 너무 아프고 모든 짐이 나 어깨에 쌓이는 것 같아서 투덜대기도 했다. 죄송하다. 또 이렇게 미안하다고 얘기하면 본인도 외할머니께 이렇게 받았으니 당연한 거라, 본인도 외할머니한테 투덜댔다고 괜찮다고 말씀하신다.
엄마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첫째 둘째 엄마 나, 이렇게 넷이 파리로 외출을 했다. 엄마가 운전을 해서 봉마쉐에 도착해 스카프도 하나 장만해 드리고 맛있는 밥을 먹고 동물원 나들이도 했다. 다녀와서 나는 침대에 뻣었지만 엄마에게 한국으로 가기 전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엄마는 이런 선물이나 특별히 뭘 하는 것보다 나와 함께하는 시간들이 선물이라고 항상 말한다.
나도 엄마가 되어 보니 '그냥 같이 있기만 해도 좋아'라는 말이 뭔지 이해하게 되었다. 특별한 뭔가를 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가정의 행복, 그게 가족인가 보다.
엄마 감사해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