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투어, 내 여행의 이름
지난 11월 딸아이와 코타키나발루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이 되었지만 여행의 잔상이 지워지지 않는다.
하루 걸러 들렀던 섬투어, 그곳에서 본 물고기들의 움직임, 야시장에서 만난 노가수의 마지막 인사, 과일 가게 아저씨의 앞니 빠진 모습까지...
여행은 3단계를 거쳐 완성된다고 했는데 마지막 단계인 여행을 정리하는 단계에서 진척이 이루어지지 않아 이번 여행이 마무리되지 않는다.
아쉬운 마음에 접한 <다크 투어, 내 여행의 이름>은 전식에 정찬까지 먹고 마지막 디저트로 나온 좋은 에스프레소 한잔처럼 내 여행을 깔끔하게 마무리해 주었다.
오랫동안 출판사 편집자로 일한 작가가 12년간 틈틈이 여행한 기록을 모아 만든 이 책은 역사의 어두운 장소 6곳을 소개한다.
그럼 작가를 따라 첫 학살의 현장 아르메니아로 떠나 보자.
오스만제국은 그리스정교를 믿는 소수민족 아르메니아인을 공식적으로 차별했다.
1914년 독일과 함께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오스만제국은 러시아를 공격했으나 연합국의 반격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아르메니아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오스만제국은 아르메니아인이 봉기를 일으키고 러시아를 도왔다며 1915년부터 이듬해까지 대대적인 학살극을 자행했는데 210만 명에 달했던 아르메니아인 가운데 생존자는 60만 명에 불과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전인 1915년, 한창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시기에 20세기 최초의 대학극이 벌어졌다.
이를 자행한 것은 튀르키예의 전신인 오스만제국의 통치 세력이었던 청년튀르크당이었고, 대상은 오스만제국 내와 접경지대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 민족 150만 명이었다.
301년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나라, 독자적인 문자를 가지고 정체성을 유지해 오던 아르메니아는 강력한 두 제국인 오스만과 페르시아 사이에 끼어 끊임없이 주인이 바뀌다가 결국 오스만제국의 서아르메니아와 페르시아제국의 동아르메니아 지역으로 분리된다.
이후 페르시아 제국이 멸망하면서 동아르메니아 지역은 러시아제국의 영향권에 들어가며 어느 정도 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이슬람교를 믿는 오스만제국 내에서 기독교를 믿는 아르메니아인들은 끊임없이 차별과 박해에 시달렸다.
아르메니아인은 무기를 소지할 수 없었고, 법정에서 증거 제출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말을 탈 수 없었다.
오스만 정부는 자민족인 튀르크인, 소수의 유목 민족인 쿠르드인, 캅카스 지방의 시르카시아인 등을 서아르메니아 지역으로 이주시켜 이들에게만 온갖 특혜를 부여했을 뿐 아니라 원주민인 아르메니아인들과 반목하고 충돌하게 했다.
대학살 이전에도 때때로 이들의 손을 빌려 곳곳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을 치명적인 파국으로 몰고 간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이 포함된 동맹국 측에 가담한 오스만제국은 연합국인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참패를 떠안게 된다.
오스만제국 내 수많은 민족들이 제각기 독립을 기치로 내걸고 봉기하는 와중에 국외 전쟁으로 국민들의 시선을 돌림으로써 난국을 타계하려 했던 오스만 정부로서는 제 발에 걸려 넘어진 셈이다.
이에 패배의 책임을 떠넘길 희생양이 필요했던 당시 국방장관이자 총사령관 엔베르의 눈이 아르메니아인들을 향하게 된다.
엔베르가 아르메니아인들을 패배의 원흉으로 지목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실제로 러시아군에 동아르메니아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전쟁 선포 전 오스만 정부가 에르주룸 지역의 아르메니아 자치회에 러시아 내 아르메니아 동족들이 차르 정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도록 고무해 달라고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것이었다.
이를 근거로 오스만 정부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와 내통했다는 선전을 광범위하게 펼치며 자국민들이 아르메니아인들을 비난하도록 몰아갔다.
그렇게 대학살의 조건이 갖춰졌다.
'어떤 사람들'을 추방하는 목적은 미래를 위해서, 우리의 조국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어디에라도 살아 있다면 절대 선동적인 생각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수를 가능한 줄여야 한다.
부모들이 어떤 고문을 당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고아들만 수용하고 보호하도록 하라.
다른 고아들은 추방 행렬과 함께 보내라.
1915년 오스만 정부의 내무부 장관 메흐메트 탈라트가 시장들에게 보낸 전보다.
'어떤 사람들'은 아르메니아인을 가리킨다.
"지구상의 모든 죽음이, 온 역사를 통틀어 존재했던 모든 죽음”이 그곳에 있었다.
총검에 찔리거나, 목이 매달리거나, 목적지도 없이 시리아나 메소포타미아 사막을 헤매는 추방 행렬 속에서 열기와 허기에 탈진해 죽어 가거나.
오스만 군인들은 가족 앞에서 딸과 어머니를 윤간하고 자식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이를 뽑아 이마에 쑤셔 박았다.
죽음의 공포가 극에 달한 아르메니아인들은 미쳐 갔다.
어미는 어린 자식을 우물에 던져 버렸고, 임신부는 노래하며 유프라테스강에 몸을 던졌다.
허기와 두려움으로 정신을 잃은 이는 자신의 배설물을 먹기도 했다.
튀르키예는 지금까지도 오스만제국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전쟁 와중에 벌어진, 양측 모두 피해를 입은 불행한 사건이라 주장하고 있다.
학살이 대부분 현재 튀르키예 영토 내에서 일어났기에 희생자 유해 발굴이나 조사 등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유대인 홀로코스트가 수천, 수만 권의 연구 논문과 서적으로 쓰이고 다큐멘터리와 영화와 드라마로 재현되며 전 세계인의 기억에 아로새겨진 것과 달리, 아르메니아인들의 '대재앙'은 철저하게 잊히고 묻혔다.
그러다가 전 세계인의 앞에 이 대재앙을 다시금 소환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땅에서 10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과 3만 명의 쿠르드족이 살해됐지만, 어느 누구도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200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튀르키예의 작가 오르한 파묵은 2005년 스위스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르메니아인과 쿠르드족 학살을 언급했다가 형법 301조에 의거 '국가정체성 부인 및 이미지 훼손' 혐의로 기소되고 극단적 민족주의자들로부터 살해 협박에 시달리는 등 큰 고초를 치렀다.
2016년에는 독일 의회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제노사이드'로 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의 경우에는 2016년 4월 22일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이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추모일을 앞두고 발표한 성명에서 '대규모 잔혹행위'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후 2021년 4월 24일 추모일 당일에 마침내 바이든 대통령이 'Armenian genocide(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오스만제국에 의한 아르메니아인의 대학살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희망은 뜻밖에 최악의 참사에서 싹을 틔웠다.
2023년 2월 6일 새벽 튀르키예 남동부 가지안테프 지역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수만 명의 사망자와 수백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가운데, 아르메니아에서 구조 인력과 구호물자를 지원하기 위해 35년 만에 양국의 국경이 개방된 것이다.
아라라트 미르조얀 아르메니아 외무부 장관이 튀르키예의 수도 앙카라를 직접 방문해 메블뤼트 차우쇼을루 튀르키예 외무부 장관을 만났다.
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튀르키예 외무장관은 “아르메니아가 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에게 우정의 손길을 내밀었다”고 밝혔다.
물론 튀르키예가 과거의 제노사이드를 계속 부인하는 한 이러한 화해는 한시적이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굳건해 보였던 장벽을 훌쩍 넘어 재난에 처한 이들을 가엾게 여기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그들에게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의 보통 마음, '인지상정'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역사의 커나 큰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은 지루한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양측이 시작한 화해의 무드가 멈추지 않고 계속되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