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 Dec 15. 2022

20대 노마드, 30대 노마드.

25개국, 65개의 도시, 지난 10년.

"이번에도 랩탑을 가져가? 말아?"

"당연히 가져가는 거 아니었어?" 하고 내가 물었고, 이렇게 덧붙였다.


"아, 그나저나 나도 이번엔 좀 놀고만 싶다..."


오늘 나와 내 남편의 대화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프랑스에 또 간다. 올해는 내 휴가가 모자라다는 핑계를 대고 주말을 껴서 딱 5일만 가기로 했다. 매번 가다 보니, 술 먹고 놀고 마시는 것도 이제는 사실 조금 지친다. 오랜만에 먹으면 그렇게 맛있는 푸아그라(foie gras: 거위 간 요리)와 소시 송 (saucisson: 말린 소시지), 수만 가지 치즈들, 샴페인, 각종 와인들도 일주일이 지나가면, 김치찌개와 팔팔 끓인 매운 라면이 생각난다.



아무튼 프랑스 시골에 내려가기 전, 파리에서 우리 둘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아마 9년 간의 연애 중에 둘이서 파리의 호텔에서 지내는 적은 처음인 것 같다. 시부모님이 남편 어릴 적 살던 집을 팔면서, 제 집같이 매년 드나들던 파리는 우리에게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살지 않는, 친구나 만나면 다행인 도시가 되었다.  


이렇게 오랜만에 파리에서 오붓한 데이트를 하게 되었는데, 베를린보다는 조금 더 따뜻하고 예쁜 파리에서 이번에는 일 말고, 정말 휴가나 오랜만에 내볼까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다녀볼 프렌치 레스토랑도 옵션이 많아 신이 난다.


-1년에 주어지는 30일의 휴가를 어떻게 다쓰지-라는 생각은 독일에 오기 전의 헛된 망상일 뿐이었다. 회사 업무 형태가 리모트로 전환이 되면서 주말과 휴가를 요긴히 겹쳐가며 기본 2주, 3주를 다른 곳에 있다 보면, 정작 연말쯤엔, 남아있는 연휴가 얼마 없다. 더군다나 올해는 한국도 가고, 프랑스에서 결혼식 및 가족 여행 등등 여러모로 쓸 일이 많기도 했다. 그렇게 올해 남은 이틀을 마지막 2022년 휴가로 냈다.





30대 중반을 향해 가려는 우리는 여전히 여행을 좋아하고, 장소를 바꿔가며 일을 하는 일명 '디지털 노마드' 삶을 즐긴다.  20대 후반까지, 그래도 제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장소에 구애 없이 여러 곳을 다녀본 우리지만, 이제 어떤 곳은 '어휴, 거기는 이제 못 가겠어,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필리핀 팔라완, 태국 치앙마이, 멕시코 툴룸, 과테말라 안티구아, 스페인 까나리아 섬, 그리스 로도스섬, 크레테 섬, 프랑스 파리, 툴루즈, 몽펠리에 그리고 마르세유. 베를린에 사는 우리가 지난 3년 간 여행하며 일한 일명 디지털 노마드들이 좋아하는 도시와 섬들이다. 이 외에도 우리 둘이 9년 동안 함께 휴가를 내고, 여행을 다닌 곳은 총 25개국 65개의 도시. 아마 이 중의 작은 도시 몇 개들은 기억도 잘 안나는 것 보니, 도시로 치면 70개 넘는 도시를 오고 간 것 같다.


필리핀 엘니도 섬과, 멕시코 툴룸에서 식중독에 걸려 된통 고생한 일이 있었다. 이렇게 음식으로 죽을 수도 있구나를 경험한 이후로, -장시간 비행을 하고 이게 무슨 개고생인가,- 싶은 생각에 더 이상 날씨가 너무 덥고 위생이 좋지 않은 국가는 못 가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필리핀 시아가오에서.


독일 바바리아 지역을 돌아다니는 내내 내셔널지오그래픽 같은 예쁜 풍경들이 넘쳐났지만, 벌벌 떠는 추위가 살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장기간 여행을 좋아하는 우리에게 빈집 월세를 매번 내고 여러 번 여행하기에는 이곳은 꽤나 지갑이 텅 비는 곳이었다. 더군다나 베를린에 살면서도 잘 먹지 않는 튀기고 짠 맥주 안주 위주의 독일 음식들은 사실 이틀만 지나도 느글거린다.


독일 오스트리아 국경 어딘가쯤


과테말라 안티구아, 아티틀란 호수, 그리고 멕시코 툴룸은 정말 디지털 노마드들이 왜 좋아하는지 가자마자 단 번에 알았다. 그만큼 너무 매력 있고 좋은 곳이었다. 친구를 잘 만난 덕에 이곳 결혼식에 초대받아 라틴아메리카를 가보다니 웬 호사인가 싶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시차로 겨우 몸을 적응을 했는데, 남편이 멕시코에서 마저도 식중독을 겪고 호텔 침대 신세를 며칠간 지면서 -라틴아메리카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라는 생각을 했단다. 남편을 옆에 두고 맥주캔을 까며 -그래, 이제 이런 여행은 그만해야겠다,- 생각했다.  


멕시코 툴룸에서의 일과후 맥주 그리고 수영장
과테말라 아티틀란 호수.



20대 때는 2주, 3주씩 휴가를 내고 정글, 오지 같은 곳을 마음껏 다니던 우리 둘도 그새 나이가 들긴 들었다. 이제는 기왕이면 우리가 좋아하면서도 가까운 도시에 자주 가는 것이 더 좋다. 3주씩 휴가를 내고 돌아와서 일 폭탄을 맞는 것보다 휴가와 주말을 적당히 섞어가며 2-3주를 여행하는 것이 업무나 내 정신건강에도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계획 여행자였던 내가 이제는 엑셀부터 펼 쳐들며 여행 계획을 짜게 되었고, 여행은 여행만 하자던 남편이 노트북을 껴고 호텔 수영장에서 일하는 걸 즐기는 시간이 오기까지 참 많은 여정이 있었다. 수백번 싸우고 화해하며 서로의 여행 스타일을 맞춰왔듯이, 목적지도 그 스타일을 맞춰가고 있는 중이다.



to be continued.

매거진의 이전글 여행하며 일하기, 4년 전의 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