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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 Feb 21. 2023

프렌즈를 보다가 문득.

당연한 일상은 없다.

최근 번아웃을 겪으면서 지난 몇 개월간 "내가 도대체 유럽까지 와서 뭐 하고 있는 거지?"란 생각을 자주 했다. 일에 치이고, 쉼 없는 미팅에 치여 너덜너덜해진 정신은 쉽게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운동을 하고, 맥주 한 병을 따도 그때뿐이었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니 일과 후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상태는 더더욱 아니었다. 매일 침대 위에 누워 핸드폰으로 시시콜콜한 한국 예능을 보거나, 유명한 한국 드라마들을 연속으로 보거나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서 사직서를 냈지만, 불경기로 인원이 감축된 회사의 상황에서 바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회사는 2개월이 남은 나를 여전히 거침없이 모든 프로젝트에 몰아붙였고,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다 보니 매일 밤 한숨을 쉬며 잠 못 이루는 밤들이 계속되었다. 결국 나는 의사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나에게 '번아웃 증상'이 보이며 2주간 일단 쉬어보라고, 일과 관련되지 않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보라는 처방을 줬다.


처방전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2주 전에 다리 인대까지 늘어나는 바람에 보호대를 차고 삐걱삐걱 대며 걷는 나의 모습을 병원 건물 유리창에서 보게 되었다. 그날도 역시 베를린의 바람은 세차게 불었고, 하늘은 구름이 낀 건지 뭔지 항상 우중충한 잿빛이다.


"한국으로 돌아갈까, "


그렇게 어렵게 이곳에 왔으면서, 조금이라도 힘이 들거나 마음이 지치면 나는 너무 간사하게 "한국으로 돌아갈까, 다 때려치우고."라는 생각을 유럽 생활 10년 차가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하고 있다.




처방전을 받고 딱히 뭘 하려고 작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런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나를 더 짓누를 것 같아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인 것 같다. 그림 그리기, 좋아하는 영화 보기, 요리하기, 1일 1잔 카푸치노 마시기, 운동하기 등등... 취미생활 위주로 하루를 채워갔다. 주말에는 남편과 낮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생맥주가 당겨 생맥주를 시키고, 밖에 나와 산책을 하려는데 비가 너무 내려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사 마셨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인데, 낮에 데이트를 하니 왠지 새롭게 보였다. 미루고 미루었던 공부들도 다시 해야겠다 싶었다. 일하고 여행한단 핑계로 띄엄띄엄 공부했던 나를 반성하며, 프랑스어 온라인 강의 패키지를 덥석 끊었다. 매일매일 2시간씩 공부한 지 일주일이 지나간다. 하루를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그래도 며칠 뒤면 다시 온라인 전쟁터, 회사에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아직까지도 내 숨통을 옥죄는 기분이다.




나와 남편은 보통 텔레비전 앞에 앉아 넷플릭스를 켜고, 한 손에 들 수 있는 정도의 그릇을 들고 저녁식사를 한다. 24시간 집에서 같이 붙어있다 보니, 딱히 큰 이벤트가 있지 않는 이상 식사 때는 말을 잘하지 않는 편이다. 연애만 9년, 결혼 대략 1년 차니 그것도 한 몫한다. 과연 같이 살면서 매일매일 쉼 없이 수다를 떨 수 있는 커플이 지구상에 존재는 할까. 아무튼 우리는 종종 저녁을 먹을 땐, 스트레스를 풀며 생각 없이 웃으며 볼 수 있는 종류의 시리즈물을 주로 본다. 우리 둘 취향에 꼭 맞는 시리즈나 영화는 찾기가 참 힘든데, 가짓수가 많지 않은 것들을 이미 다 본 터라, 최근 우리는 다시 미드 프렌즈"Friends"로 돌아왔다.


90년대 시리즈물을 보면서 당시의 스타일이 지금 우리의 유행 스타일과 비슷하다는 것에 한 번 놀라고, 이제는 보톡스를 하도 맞아 얼굴이 이상해져 버린 주인공들이 너무 젊고 예쁘다는 것에 두 번 놀라며, 가끔씩 최근 정서에 맞지 않는 그때 당시의 불편한 농담들에 세 번 놀란다. 그래도 프렌즈는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남편이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가져다 놓고 부엌에 간 사이,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시리즈의 한 편이 끝날 때까지 멍을 때리고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 내가 언젠가는 외국인들과도 함께 지내보고 싶다란 생각을 프렌즈를 보면서 했었지, "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은 어떻게 다들 영어 공부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영어 공부를 하던 고등학교 시절에는 당시 넷플릭스 같은 콘텐츠 플랫폼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프렌즈는 나처럼 당시 영어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교과서와도 같았다. 자연스럽게 미국의 문화라는 것을 이 시리즈를 통해 처음 접했고, 언젠가 나도 외국에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만들어준 시리즈였다.


'친구들끼리 한 집에 사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

'새로운 도시에서 살아보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

'뉴욕은 어떤 도시일까, '

'나도 영어를 능수능란하게 한다면 어떨까, '

'미국에서는 스페인어를 다들 조금씩은 배우나 보네, '


나에게 프렌즈는 생각보다 많은 호기심을 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미국이 아닌, 프렌즈에서도 항상 신기하고 자유로움으로 묘사되는 유럽에서 살고 있다. 이제 나는 영어로 일하고 생활한다. 그들이 아파트를 셰어 하며 친구들과 동거동락했듯, 나도 20대 중반, 스페인 바르셀로나, 그리고 코르도바에서 여러 명의 각양각색의 친구들과 한 집에서 요리를 했고, 파티도 했으며, 울고 웃는 날들을 보냈었고, 덕분에 스페인어도 할 줄 알게 되었다. 나도 그들처럼 짝을 만났고, 그 짝이 프랑스 사람인 바람에, 열심히 배운 스페인어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려 다시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지만 말이다. 오늘 저녁은 그가 해준 프렌치식 크레페(crêpe)를 먹었다. 집에 낡지만 잘 버티는 오븐 하나가 있어 오늘 아침에 슈퍼마켓에서 산 초콜릿과 버터, 밀가루로 초콜릿 쿠키를 만들었다.


궁금하고 동경하기도 했던 그들의 텔레비전 속의 삶이 이제는 어엿하게 나의 삶이 되어 있었다. 왜 그렇게 다 이루고 나서 작은 어려움에 다 포기하려고 생각했는지, 헛웃음이 났다. 나 너무 잘 살고 있었는데 말이지.


새로운 삶을 찾아 새로운 도시에 온 것은 맞지만, 안타깝게도 인생이란 참, 어딜 가든 결국 비슷하게 흘러가게 된다. 친구를 사귀고, 내 주변에 사회라는 것이 형성되면 외국도 더 이상 "뉴 플레이스"만일 수는 없다. 사람 사는 것 다 똑같다는 말이 있듯, 새로운 곳이 나의 일상으로 굳어져가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곳에 와서도 나처럼 번아웃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그 어디에도 파라다이스는 없다.


다만 그런 일상들도 내가 어떻게 만드냐에 따라 달려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어렵게 일궈낸 나의 새로운 일상들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프렌즈를 보다가 말이다.


I'll be there for you - (네가 필요할 때 항상 내가 있을게) 라며 흘러나오는 ost가 유난히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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