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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육아일기

유럽에서의 육아일기 5 ㅣ 나라는 사람

by Sun

"우리 엄마가 나는 10개월쯤 -아빠, 엄마-를 말할 줄 알았대."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 너 뭐 영재였어?"

진짜라니까, 그러니까 레아가 지금쯤 말을 시작할지도 모른다고."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신거겠지,"

"진짜인지 볼래? 나 우리엄마가 나 어렸을 때 쓴 육아일기 가지고 있어,"


나와 프랑스 남편의 대화다.


우스개 소리로 우리 엄마가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몇 년간 쓴 30년도 넘은 옛날옛적 육아일기를 펼쳐보았다. 그리고 그 중에 눈에 밟히던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너의 모습을 보면서 엄마는 가끔씩 엄마 자신을 잃어버릴 때가 많다는 생각을 한단다. 너를 예쁘게 키우고 귀엽게, 밝게,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최대의 목표인데 ..(이하 생략)" 라는 대목. 나도 이제는 엄마이기 때문에 더 눈에 들어왔을지 모르겠다. 아마 모든 엄마가 같은 생각을 하겠지. 아무튼 엄마의 육아일기는 처음에는 나의 이야기를 하나 싶다가, 점점 해가 갈 수록 자아성찰의 느낌이 드는 일기의 느낌이 났다.


최근 1년에 가까웠던 육아휴직이 끝나가면서 직장에 다시 돌아갈 생각으로 스트레스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매년 뭔가 목표를 세워서 무엇인가는 하고 있있던 나라는 사람이 아이를 키우느라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음에 좌절감 또는 우울함 비슷한 감정 또한 꽤나 자주 느끼고 있었다. 그 와중에 아기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아기로 인해 울고 웃는 날들이 계속 되면서 아마 나의 감정, 나의 삶은 잠시 미뤄두고 있었던 것 같다. 모든 엄마가 그렇겠지만.


항상 그 탓은 결국 "오늘은 날씨가 별로여서 그랬었지," "이 나라는 이게 역시 문제야,"라는 둥의 외국인 특유의 사치 아닌 사치같은 생각으로 덮어뒀고, 그렇게 10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너무나 다행히도, 나와 같이 육아를 보내며 신생아 시절의 엄마의 삶을 함께 보내고, 아기의 개월수에 맞춰 같은 고민을 나누는 친구들이 주변에 있어서 너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가장 힘들다는 첫 해의 육아를 해외에서 말도 잘 안통하는 (언어가 아닌, 육아에 대한 "말.") 프랑스인 남편과 긴 터널을 걷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가뜩이나 잠이 부족해 피곤한데 임신, 출산으로 부러질 것 같은 허리, 이전보다 더 자주 망가지는 손목. 잘 먹고 잘 자라줘서 고맙지만 보통 우량아가 아닌 아기를 등에 업고 집안일만 해도 벅차는 체력. 햇빛이라도 쬐면 낫겠지 했지만 여전히 밤잠은 설치는 우리 아가...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잠깐 아기가 잠들며, 나도 졸립지 않은 30분, 길어야 1-2시간. 대개는 아기와 같이 지쳐서 잠이 들어버리니 이 육아휴직이라는 1년 동안 아기를 키우는 것 외에 뭔가를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었다. 하루에 20분씩 요가, 운동을 하는 것으로 체력을 키우기에는 턱도 없었다.


우리에게 태어난 보물 같은 아기이고 첫째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르니 정성을 다해 키워보겠노라 매달 아기 성장 영상도 만들어 따로 저장해놓고, 육아일기도 쓰고. 최근 이유식도 시판으로 먹이다가 잘 먹지 않아 직접 만들면서 1년 육아휴직을 그야말로 정성을 다해 보내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더더욱 나를 위한 시간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최근에 뼈저리게 느꼈다.


어제 남편이 같이 외식을 하고 들어와서는 자기는 낮잠을 자지 않고, 컴퓨터 게임을 조금 하고 싶다고 했다. 이 때가 아니면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가 없다며, 졸린 눈을 비벼가며. 눈을 붙이라고 했지만 그 심정이 이해가 안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놓고 저녁에 피곤하다고 불평하길래 한 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나도 그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니 넘어갔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기를 재우고 남편에게 뭔가 최근 나에 대한 시간과 내가 작년에 레아 말고 이뤄놓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며 푸념아닌 푸념을 했다. 그랬더니 "육아휴직이 휴직이 아니라 풀타임 잡이라는 건 너가 제일 잘 알잖아? 이 기간에 뭔가 다른 걸 할 생각을 했다는 자체가 대단한거지만, 이미 아기 하나를 키우는 것 자체가 업적인데, 여기서 뭘 더할 수 있겠어, 원래 첫 해는 다 힘든 거라잖아," 라고 해서 눈물이 날 뻔 했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라는 것이 참 복잡 미묘하게 남녀차별을 운운하게 하는구나라고 종종 생각했고, 입밖으로도 항상 내뱉었지만 말이라도 저렇게 하고, 알긴 알아주니 다행이다 싶었다. 오죽하면 독일 회사에서는 육아휴직 기간 동안 회사 이메일을 중단시켜놓을까. 일하지 않고, 본업에 집중하라는 이야기겠지.


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육아휴직 기간에 본인에 대한 자아를 돌아볼 시간이 참 많았던 것 같고,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아기에 대한 글이 아닌 나에 대한 글을 아주 오랫만에 남겨본다. 아기가 성장할 수록 이런 생각은 아마 더 할지도 모르겠다.


인스타그램에 잠깐 비추는 사진과 영상에 담긴 화목한 우리 가족의 모습이 전부는 아니다. 그 한장의 사진 속에는 말할 수 없던,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있었다. 아마 모든 이들이 그럴 테지만. 결국 소셜네트워크도 "우리는 이렇게만 행복하게 살고 싶어,"라고 모두가 외치는 그런 공간이니까.


아무튼 찾아봤던 육아일기에서는 나는 14-5개월 쯤 말이 트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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