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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의 이사, 번아웃.

업무, 육아, 그리고 이사.

by Sun

프랑스에 이사 가기로 결정을 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은 바로 "어떻게 이사를 할 것인가, "였다.


10년 전 베를린에 올 때만 하더라도, 아무리 커봤자 짐가방 2개가 전부였는데 늘어난 살림과 아기 용품까지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했다. 한국처럼 포장이사가 잘 되어있으면 참 좋았겠지만 여기는 그런 서비스 이사는 대략 7천 유로 (한화 천만 원) 가량에 해당했다. 트럭 하나를 빌려 운전수에게 맡기는 것은 2천 유로. (한화 약 3백만 원)


트럭을 끌고 자기가 오겠다는 이 유럽인 남편을 극구 뜯어말렸다. 왜 유럽인은 사서 고생하는 게 기본 착장이 되어있는 것일까.


집에 가구들은 대부분 중고로 팔거나 친구들에게 주고, 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마르세유집에는 가구가 풀착장되어있으니까.


결국 우리는 박스를 여러 개 만들어 각종 택배업체를 통해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나온 박스만 33개. GLS, DHL, Hermes... 베를린 집 근처에서 택배를 맡아주는 여러 가게들을 돌아다니며 박스를 맡겨놓았다.


카쉐어링앱 덕분에 집 근처에서 필요한 차를 금방 픽업 가능했고, 10년 전보다는 그래도 조금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일매일이 노동이었지만.




나름 종류별로 구분한다고 짐을 쌌지만 집구석구석에서 나오는 물건들이 뒤섞이고, 한정적인 박스크기에 테트리스하듯 맞춰 넣으니 박스를 5개쯤 만들 즈음에는 이미 뭐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택배 라벨지에 붙어있는 운송장 번호와 일부 아이템들만 엑셀에 적어 정리해 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날, 레아의 몬테소리침대를 마지막으로 모든 박스를 부쳤다.


이 박스를 다시 받고 풀러 언제 정리하나 싶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한다.




회사에서 지난주쯤 매니저가 메시지 한 줄을 보냈다. "미안한데, 회사 규정상 프랑스에 더 이상 오래 나가있지 못한다더라. 모든 이사 일정을 바꾸길 바란다."


.....


2개월 전부터 괜찮냐고 확인하고 인사과를 통해 물어볼 때도 오케이라고 하더니, 이제 와서 이사일정을 9월로 미루고 베를린에서 끝까지 일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


이미 관둔 회사였고, 독일의 3개월 노티스로 열심히 핸드오버 해주려는데, 새로운 프로젝트를 주질 않나... 굳이 일손 모자라는데 새로 뽑은 팀원을 수습기간에 해고하더니 그 일까지 주지 않나... 여러모로 매니징 참 못하고, 커뮤니케이션 별로였던 매니저였는데 그렇게 결국 마지막까지 일을 냈다.


더 이상 이 회사나 매니저에게 잘 보일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떠나는 회사.


매니저의 마지막 메시지에 나는 어떤 답장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열심히 일해줬던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뿐. 한국 가서도 밤 11시에 미팅을 들어가고, 가족 식사를 서둘러가며 일을 했는데 그냥 모든 것이 허무했다.


이렇게 일해서 뭐 하나 싶고.




그렇게 바로 담당 의사를 찾았다. 현재 겪고 있는 울분과 일에 대한 의욕이 없어졌다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의사가 속상하다는 듯 한숨을 푹 쉬며, 내가 어떻게 도와줄까,라고 했다.


나의 번아웃 상태가 생각보다 심한 것 같아 걱정이 된다고 했다. 우선 3주 병가를 줄 테니 그 이후엔 프랑스에 이사 이후 영상 진료를 통해 더 연장하라고 했다. 그리고 프랑스에 가서 일을 쉬고 다른 일을 시작하길 바란다며.


집에 돌아와 번아웃에 대한 내용과 함께 3주간의 병가를 통보했다. 팀에게는 미안하지만 나에게는 선택이 아닌 필요성에 의한 결정이라고.


팀원들로부터 -충분히 이해한다, 나라도 그랬다, 팀 걱정은 하지 말고 죄책감도 갖지 마라. 꼭 회복되고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매니저한테서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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