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도 투잡이 되나요?
새로운 새해가 밝았다. 물가는 어김없이 올랐지만 내 월급은 오르지 않았고, 일은 끊임없이 쏟아지지만 보너스는 나올 기미가 없다. 답답한 마음에 사주를 보러 가니 올해에는 직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재물운이 있단다. 재테크에는 자신이 없는데, 복권이라도 사야 하나? 실없는 소리를 하는 나를 보며, 친구는 한 마디를 남겼다. “요즘 너 빼고 다 투잡해.”
생각해보니 옆자리 팀원은 웹소설을 쓴다고 하고, 부장님은 주말마다 강연을 나가시는 것 같다. 나는 뭘 잘할 수 있을까? 그나마 할 줄 아는 건 외국어인지라, 외국어 부업을 검색해봤더니 프리랜서 번역가를 모집하는 글이 눈에 띈다. 하지만 번역을 부업으로 해도 될까? 보통 전공 학과를 졸업해서 전업 번역가로 활동하지 않던가? 누가 나에게 확실한 길을 알려줬으면!
저는 번역이 전업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그래도 주변의 전업 번역가분들과 제 생활을 비교해보자면, 아무래도 제일 큰 건 번역이 생계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어요. 전업 번역가분들은 번역이 주된 수입원이자 생계이기 때문에, 부업 번역가분들에 비해 의뢰를 거절하는 데 부담이 좀 있으신 걸로 알고 있어요.
또 저는 작업을 할 때 집중력이 매우 높은 편인데, 번역을 하며 시간당 쓰는 에너지가 어마어마하더라고요. 그래서 번역을 전업으로 할 경우 스트레스 관리가 어렵겠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사람을 대하거나 기획하는 일을 더 좋아하기도 해서, 일찌감치 전업 번역가의 길을 접게 되었죠.
많은 분들이 제가 뭔가 엄청난 각오나 깨달음을 가지고 번역을 시작했을 거라고 생각하시지만, 특별한 계기가 있는 건 아니었어요. 단순히 먹고 싶은 건 많은데 돈이 없어서 시작했죠. 제가 다니던 학교는 1학년 전원 기숙사 제라는 특이한 시스템이 있어서 보통 대학생들이 많이 하는 카페 알바나 과외를 하기도 어려웠어요. 그래서 기숙사 안에서 앉아서 돈 벌 수 있는 알바 거리를 찾다가, 우연히 한 사이트에 뜬 번역가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하게 되었죠.
막상 번역을 시작해보니 제가 편한 시간에, 편한 장소에 누워서 돈을 벌 수 있는 신세계더라고요! 그 이후로 틈틈이 번역을 해온 게 지금에 이르렀네요. (웃음)
첫 번역물은 아직도 기억나네요. 캐나다 요리 학교에 지원하시는 분의 입학용 자기소개서였어요. 내가 한 번역에 이 분의 합격이 달려있다고 생각하니까 엄청 긴장되더라고요. 과장을 좀 더 보태자면, 제 대학교 입학 원서를 쓸 때만큼의 에너지를 모아서 한 문장 한 문장 번역했던 기억이 나요. 심혈을 기울였죠.
가장 애정이 많이 가는 번역물 역시 이 첫 번역물이에요. 번역을 하면서 내가 돈을 버는 것 외에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걸 굉장히 직접적으로 느낀 경험이었어요.
저는 초등학생 때부터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는 게 취미였어요. 제가 추천드리고 싶은 ‘띵작’은 <울프스레인>이에요. 애니메이션이 아이들을 위한 콘텐츠라는 걸 깨부수는 작품이거든요. 디스토피아 장르라서 어른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해요. 주인공도 잘생겼고요. (웃음) 칸노 요코가 OST를 만들었는데, 워낙 멋진 곡들이 많아요.
저도 일본어 번역을 가끔 해요. 애니메이션을 취미로 보다 보니, 일본어를 독학하게 됐는데 일본어 실력이 점점 늘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가끔이지만 일본어 번역을 맡은 적도 있어요. 지금은 영어, 일어, 중국어까지 총 4개 국어를 하고 있어요. 중국어는 제가 어렸을 때 중국에서 4년 간 거주한 경험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하게 됐고요. 언어별로 번역 수요가 조금씩 다르고, 요구하는 숙련도도 조금 다르긴 해요.
저는 인하우스 번역가로 일해본 경험은 없어요. 쭉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해왔고, 그마저도 번역이 늘 부업이었어요. 프리랜서 번역가의 장점 중 하나는 일을 원할 때 원하는 만큼 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한 달 계획을 미리 세우고, 이번 달 일정에 맞춰 하루에 몇 시간씩 번역할 지를 정한 후에 일을 받았어요.
대부분의 프리랜서 번역가는 번역 에이전시에 속해서 일하게 되는데요, 그래서 클라이언트와 제가 직접 소통하는 일은 매우 드물어요. 그 대신 에이전시의 PM님이 작업을 관리해주세요. 번역 의뢰가 들어오면 PM님이 카톡이나 메일로 진행 여부를 물어보시고, 가능하면 일을 시작하는 거죠.
저는 직장인과 사업가, 그리고 프리랜서를 모두 경험해봤는데요, 프리랜서는 직장인과 사업가의 중간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직장인은 정해진 체계와 달콤한 월급 (웃음) 이 있지만, 일에서 자율성을 발휘하긴 어려운 것 같아요. 반대로 사업가는 엄청 자유로워요. ‘이번에 이 기획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면 바로 해보면 되고, 누구에게 보고할 일도 없으니 양식이나 규칙에 끙끙거릴 필요도 없어요. 제 경우는 1인 지식 사업이라 출퇴근도 굉장히 자유롭고요. 하지만 그만큼 자유에 대한 책임도 오롯이 나 혼자 져야 해요. 망하면 정말 나 혼자 망하는 거죠. 프리랜서는 딱 둘의 중간인 것 같아요.
제가 번역하는 분야는 산업 번역, 혹은 기술 번역이라고도 하는데요, 산업 번역은 번역가의 이름이 알려지기 어려운 분야예요. 회사나 개인이 필요로 하는 정보성 문서를 주로 번역하거든요. 그 대신 수요도 가장 많고, 현실적으로 돈을 벌고 싶은 번역가 분들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분야이기도 해요.
보통 번역가로 이름이 알려진 분들은 출판 번역가나 영화 번역가이신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제 분야에서는 한 명을 꼽을 수는 없고, ‘애쓰시는 모든 산업 번역가분들!’을 좋아한다고 답변드리고 싶네요.
다음 주, 정성희 튜터님의 못다 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