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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남세아 Mar 16. 2024

적갈색 꽃잎을 하얗게 지지다



20밀리리터 적갈색 작은 병 뚜껑을 돌려 따면 하얀 불투명 마개가 나온다. 마개 가운데는 2밀리미터도 안 되는 작은 구멍이 하나 있다. 병 색깔이 어둡고 안에 들어 있는 물질도 적갈색이다 보니 아무리 들여다봐도 도통 속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손가락으로 쑤셔 넣어서 벌릴 만큼 구멍이 큰 것도 아니다. 오직 적당한 크기와 기다란 막대기로 만들어진 존재만 들락거릴 수 있다.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적갈색 위험물질이 필요한 날이 왔다.



오늘 적갈색 물질로 처리할 표적은 세 개다. 두 개는 서로 가깝게 붙어 있는 고정표적이고 다른 한 개는 현란하게 움직이는 이동표적이다. 고정표적은 두툼한 방호막으로 엄폐한 상태라서 감시가 쉽지 않다. 이동표적은 감시가 용이하지만 누구보다도 빠르기 때문에 추적이 쉽지 않다. 잘 못 놀리다가 패가망신할 수도 있기 때문에 고착 후 단 번에 제압하는 게 중요하다. 가끔 세 표적이 모일 때가 있는데, 찰나를 포착하고 일망타진하는 게 최선의 방책이다.



그러기 위해서 워게임을 충분히 해야 한다. 머리로 수십 번 그려봐야 실전에서 완전작전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흔 해를 넘게 살아내며 산전수전 파병까지 경험했지만, 작전을 목전에 두면 늘 긴장한다. 이번 작전 표적이 한 곳에 모이도록 여건조성한 뒤 가용한 무기를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다뤄야만 전투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물론 피해는 감수해야 한다. 만약 감당할 수 없는 심각한 피해를 입으면 물질적 정신적으로 고통이 따르고 트라우마가 되어 다음 작전까지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다시 한번 워게임을 했다. 최종 예행연습을 마치고 공격 직전에 적갈색병과 무기를 앞에 두고 서서 심호흡을 했다.



왼손 엄지와 검지로 적갈색 병을 었다. 다른 손에는 어느새 무기가 들려있었다. 실수다. 표적을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서 고정표적을 둘러싼 엄폐물, 그러니까 섹시하고 두툼한 입술을 크게 벌린 상태로 고정시켜야 했다. 그래서 정신을 가다듬고 두 손가락으로 입술을 고정시킨 다음 무기, 그러니까 기다란 면봉을 적갈색 병 가운데 구멍 속으로 힘껏 찔렀다. 충분하게 적신 면봉을 단숨에 입과 혀로 가져다 댔다. 면봉을 돌려가며 적갈색 물질, 그러니까 알보칠을 흠뻑 발랐다. 적갈색 알보칠이 입에 핀 빨간 장미, 그러니까 피로에 찌들어 생긴 벌건 구내염 세 개를 하얗게 지졌다. 하얗게 지진 입과 혀를 달래려는지 눈과 입에 맑은 액체, 그러니까 눈물과 콧물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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