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들에게 얘기하면 모두 한결같이 하는 대답이 있다. 괜찮다. 아직 멀쩡하다. 내가 젤로 기억력이 좋다. 등등.
"나는 아직은 괜찮어, 치매는 아니지. 얼마나 기억력이 좋은디."
젊었을 때부터 기억력은 진짜로 좋았다며, 아직까지 다른 사람들보다 기억력은 좋다고. 끄덕 없다고 약속한 것처럼 모두 같은 말씀을 하셨다.
"거기까지 가면 그냥 죽어야지. 살아서 뭐 허게. 내가 알아서 다 챙겨서 약도 먹고 공부도 허고 그렸지, 그러니께 아직까지는 멀쩡하지."
동네에서도 내가 제일이라고 엄지손가락을 곧게 세워 보였다. 자녀들이 신경 써주고 매일 안부전화 챙겨주고 먹을 거 다 갔다 주고 얼매나 잘 살고 있는데 치매냐며 눈을 다른 곳으로 피했다.
초기에 치매를 미리 준비하는 어르신들의 대답은 달랐다. "혹시 치매에 걸릴까 봐 미리 약 챙겨 먹으려고 검사 한번 받아 볼까 해서 왔어."라며 누가 먼저 얘기하기 전에 스스로 챙기는 경우가 많았다. 치매에 걸릴까 봐 약도 스스로 챙기고 책도 읽고 종교가 있는 분들은 성경책 공부도 하셨다.
얼마 전에 아버지에게 치매검사를 하러 가자고 넌지시 얘기를 건넸다. 단번에 거절을 당했다. 어쩜 하시는 말씀이 녹음기 틀어놓은 것 같았다.
"니 아빠 아직은 멀쩡하니까 걱정하지 말어. 내가 기억력 하나는 젊어서부터 좋았어."
얘기와는 다른 모습들이 점점 많아졌다. 방 한쪽에 있는 조그만 찻상 위에 노스름한 가루는 다시 한통이 채워졌다. 틀니를 했지만 불편하고 좋지 않다고 라면 국물에 밥을 말아 드신다며 계속 라면을 고집하셨다. 수프가 아깝다며 남은 봉지를 탈탈 털어서 통에서 모두 모아놓았다. 만지려고 하면 날아오는 한마디.
"내가 다 알아서 하니까 따님은 그런 것까지 신경 안 써도 돼."
버릴까 봐 손이 닿기 전에 미리 하시는 말씀이었다. 무언가를 모아놓기를 반복했다. 라면 봉지를 곱게 접어서 모아놓기도 하고.
어렸을 때 할아버지 댁 대청마루 천정 아래에 통나무 3개로 기다랗게 만들어진 선반이 있었다. 그 높은 선반 위에는 귀하디 귀한 삼양라면 박스 한 두 개 정도는 항상 놓여 있었다. 어린 우리들의 손은 라면박스가 놓인 노은 선반까지 닿지 않았다. 행여 어린 손주들이 꺼내서 생으로 수프를 뿌려서 먹을까 봐 할머니가 미리손을 써 놓은 특단의 조치였다. 그곳이야말로 라면박스의 안전지대인 셈이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 도와서 층층계단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을. 제일 든든한 오빠가 바닥에 엎드렸다. 다음으로 남동생이 등을 평평하게 만들고 네 발로 엎드려 있는 형아 등을 올라갔다. 내 임무는 옆에 서서 동생이 떨어지지 않게 허리를 받쳐주는 것이었다.
"빨리빨리"
엎드려 있던 오빠는 힘이 부치기 시작했는지 급하게 외쳤다. 키가 작은 남동생이 팔을 뻗으면 손이 닿을락 말락. 까치발까지 하고 몸을 최대한 길게 위로 쭈욱 세우면 드디어 박스에 동생 손이 닿았다. 그러면 동생은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라면 한 봉지를 꺼내 자랑스럽게 팔을 흔들어 보였다. 두 봉지는 들키기에 위험한 공간이 생기기에 늘 한 봉지로 만족해야 했다. 그날도 아무도 없는 대청마루 위에서 수행한 우리의 비밀 작전은 성공했다.
라면 한 봉지를 들고 뒷마당 언덕 위 감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은 마당보다 높아서 누가 오는지 잘 살펴볼 수 있었다. 눈은 대문을 향하고 손은 라면봉지 위를 왔다 갔다 바쁘기만 했다. 입이 짜다. 동생이 혀를 내밀고 날름거렸다. 맵고 짜고 그래도 맛있다며.
알면서도 어른들은 모른 척하신 것 같다. 그렇게 한 봉지씩 사라지는 라면 봉지를 계속 모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하는 것을 다 지켜봤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때의 라면에 대한 추억 때문인가. 아버지는 유독 라면을 좋아하셨다. 단짠에 꼬불꼬불하고 꼬들꼬들한 면발에 기름지면서 짭조름한 국물이 가득한 냄비. 여기에 공깃밥 하나와 김치가 최고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