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환율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다.
뉴스에서는 연일 원화 약세 이야기가 나오고, 누군가는 “또 IMF 오는 거 아니야?”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코로나 시대만큼 가슴 시린 기억이 떠오른다.
1997년 겨울, 텔레비전 화면 아래로 흐르던 자막.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요청.”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외국어 고등학교의 특성상 서울 강북과 강남, 지방 또는 해외에서 온 다양한 성장배경의 학우들이 있었고 IMF의 여파도 다양한 모습으로 볼 수 있었다. 먼저, 공교롭게도 IMF는 당시 시험 범위에 나오는 국제기구 이름이었고, 처음 뉴스에서 언급되었을때 '낯설지 않다'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점점 학교와 집 안 분위기가 눈에 띄게 무거워졌고, 뉴스와 인터넷에서 연일 IMF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올때면 어른들의 말수가 줄어들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체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점점 우리의 생활 속에도 영향을 미쳤다.
같은 반 친구 중에 부모님이 두 분 다 교사인 친구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교사는 ‘절대 망하지 않는 직업’으로 불렸다. 게다가 친구의 아버지는 중학교 교감 선생님으로 정년퇴직을 하셨고, 어머니는 아직 현직 교사셨다.안정적인 월급, 정년 보장, 연금까지, 두 명의 누나를 둔 친구의 부모님의 유일한 걱정은 어머니가 현역에 계실 때 누나들이 시집을 가서 축의금이나 좀 더 받는 것 정도로 노후와 미래는 탄탄해 보였고, 그 집은 IMF와는 상관없을 세계에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가 말했다.
“우리 집 큰일 났어.”
친구 아버지는 당시 전도가 유망했던 대우에 연금대신 퇴직금을 받아 투자를 하셨고, 수익율이 괜찮자 친구 어머님도 퇴직금을 당겨서 투자를 한 상태였다고 했다. 그리고 IMF 구제금융 발표와 함께 대우의 주가 폭락으로 투자금을 거의 다 날렸다는 이야기였다. 교사 월급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손실이었다. 친구의 집 분위기는 단숨에 바뀌었다. 그리고 친구의 생활도 바뀌었다. 친구의 큰 누나는 파혼을 했고, 나와 같이 다니던 친구의 학원 하나가 끊겼다. 그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표정에서 ‘안전하다고 믿던 세계가 무너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강북의 IMF라고 하기는 단적인 예지만, 작은 중소기업과 자영업 중심의 경제활동을 하던 집들은 말 그대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런 경제에 포함되었던 집들은 한 번 무너지면 다시 올라올 발판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업을 접은 사람은 곧장 생계형 노동으로 내려왔고, 집을 잃은 사람은 동네를 떠났다. 그 시절 내가 살았던 강북 공원에는 낮 시간에도 어슬렁거리는 어른들이 늘었다.
강남에 사는 친구의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한 친구는 미국에서 유학 중에 돌아와 편입했다. 나이 차이가 나는 형이 “미국에서 박사학위 한다”는 말은 친구에게는 일종의 자기소개처럼 따라붙었는데, IMF 사태가 터지고 얼마 뒤, 그 친구의 형도 학업을 계속하기에는 어려워진 가세로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귀국했다. 좀 더 친한 친구 아버지는 외국계기업들과 주로 거래를 하는 무역회사를 했는데, 환율 폭등과 거래 중단이 겹치며 결국 파산직전까지 갔다. 회사는 어쩔수없이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을 했다. 하지만 그 집은 당장 거리로 나앉지는 않았다. “부자는 3대는 간다”는 말처럼, 버틸 자산은 있었던 것 같다. 다만 모든 것이 바뀌었다. 사장님이었던 친구 아버지는 경영권을 넘겨주었고 강남의 아파트 한 채 말고는 다 팔아서 정리해고한 회사 직원들을 챙겨주고, 나머지는 현금화하여 버티기에 들어갔다. 집은 그대로였지만, 친구에게 간간히 듣는 집 안의 공기는 달라져 있었다. 모두 그렇지는 않지만 당시 경험한 강남의 IMF는 추락이라기보다는 하강에 가까웠다. 정상에서 중간으로 내려온 느낌. 체면은 유지됐지만, 자부심에는 금이 갔다.
IMF 구제금융 정책이 발표되었던 그해 겨울, 대한민국은 이상하고 엄청난 풍경을 보았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결혼반지, 목걸이, 금니까지 내놓았다. 금 모으기 운동.
어른들, 아이들은 손에 손을 잡고 방송에 나와 말했다. “나라가 어려우니까, 우리가 나서야 한다.” 그 장면은 뉴스마다 나왔고, 학교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 얼마나 금을 나꾸었는지 이야기했다. 그때만큼은 남녀노소 지역 등 우리를 갈라놓았던 구분의 경계가 흐려졌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각자 가진 것을 내놓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단순한 경제 행위가 아니었다. 공포를 견디기 위한 집단적 의식에 가까웠다. ‘우리가 함께 버티고 있다’는 신호. 그 신호가 없었다면 그 시절을 더 견디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IMF는 모두에게 왔지만, 모두에게 같은 모습으로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집안이 망할 정도로 커다란 두려움이었고 견뎌내기 힘든 고통이었다. 또 누군가에게는 “여기서 더 내려갈 수 있다”는 불안으로 모든 것을 변화시킨 상황이었을 것이다. 절대적으로 또는 상대적으로 생존과 정체성의 문제를 온 나라가 겪었었던 시기였다. 한편으로는 회복탄력성에 대해 성찰하게된 시기였다. 앞에서 언급한 교사 부모님을 둔 친구는 유명한 회계사가 되었고, 강남 사업체를 포기했었던 친구 아버지가 당시부터 지금까지 끝까지 지켰던 아파트는 압구정 H 아파트였다.
요즘 환율 뉴스를 보며 사람들이 다시 IMF를 입에 올린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지금의 불안은 절대적 결핍보다는 상대적 박탈에서 나온다. 그때처럼 모든 기업이 무너져 내린다거나, 환율의 낙폭이 대응할 수 없을 정도라던가, 경제상황과 대응 순준이 그 당시만큼 위태롭지는 않다. 하지만 불안은 계좌 잔고보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데서 나온다. IMF를 겪은 세대는 안다. 진짜 위기는 숫자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먼저 무너질 때 온다는 걸.
■ TMI: IMF시대 보다 금값은 얼마나 올랐을까?
1997년 어느 시점인가에 따라 다르다.
1) IMF 구제금융 발표 전: 환율 달러 당 1060원,
금시세 $304/oz (36.65달러/돈)
2) IMF 구제금융 발표 후 환율이 가장 높았을 때:
달러당 1964원, 금시세 $289/oz (34.9달러/돈)
우리나라 환율 피크시 국제 금값은 오히려 하락하였다.
2026년 현재(1.1기준): 환율 달러당 1441.8원,
금시세 $4,315/oz(520달러/돈)
1) 1997년 평년기준: 달러기준 환율은 36.7% 상승,
금값은 19.11배(1841%) 상승
2) 1997년 환율 피크시 대비 환율 24% 하락,
금값은 15배 상승
결론: 금값은 15배 이상 올랐고, '돌반지'는 부담스럽다.
■ AI시대의 육아 한 줄 성찰
아이에게 물려줄 가장 큰 자산은 어떤 위기에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회복탄력성이다. IMF는 돈을 잃게 했지만, 한 세대에게는 회복하는 법을 가르쳤다.
AI 시대의 불안 앞에서 아이에게 필요한 건 불확실한 예측속에 부모가 걱정과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예측되는 상황를 대비하고 직면한 문제를 슬기롭게 극복해내는 회복탄력성이다.
여러분의 공감(♥)은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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