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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사라 Jun 26. 2024

내가 암이라니?!

암 진단 분노의 5단계

 부정 그리고 분노


 유방암 진단을 받고 수술한 지 불과 1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기억을 되살려 글을 쓰려고 하니 당시 일기를 들춰보는 일이 못내 새삼스럽다. 사실 너무 힘들었던 시간이라 다시 그때 쓴 글을 보는데도 용기가 필요했다. 많이 익숙해졌고 씩씩하게 잘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그날의 나와 마주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나의 유방암 극복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그 포문을 열기 위해 비밀번호를 걸어 뒀던 일기장을 열었다. 2023년 4월 13일 내 생일에 쓴 글이다.


‘오늘은 내 서른두 번째 생일.

이생에 미련 따위 없고 죽어도 별로 여한 같은 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크나큰 오만이었다. 나는 아직 살고 싶고 행복해지고 싶다. 

… 생일 축하한다. 사라야! 태어나서 정말 행복하고 온 마음으로 감사하다.’


 수술을 며칠 앞둔 내 생일에 이토록 삶에 간절하고 감사한 날이 있었나 싶다. 2023년 3월, 남편 회사에서 2년마다 해주던 건강검진을 여느 때처럼 받았다. 결과가 나오기 전이었는데 병원에서 직접 연락이 왔다. 유방 촬영한 것에 이상이 있어 보이니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미세석회화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던 터라 그냥 “아 네! 가볼게요.” 하고 넘겼지, 눈곱만큼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병원 가셨나요?” 아직 안 갔다는 말에 간호사는 말문이 막힌 듯 말했다. “심각한 상황이에요. 교수님이 병원 갔는지 다시 확인해 보라고 해서 연락드린 건데 아직도 안 가셨다고요?” 그때 뭔가 잘못된 건가 싶었지만 ‘암’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난 너무 젊고 건강했으니까. 아니, 그렇게 착각했으니까. 

간호사에게 물었다. “큰 병원이 어딘데요? 어떻게 예약해야 하는데요?” “잠시만요.”라며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 차단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지 예약팀에 급하게 전화하는 소리가 그대로 내 수화기 너머 들렸다. “32세 환자인데 좀 빨리 예약 못 잡아주나요? C5 환자예요.” 

C5? C5가 뭐지 하며 검색해 보고 나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안 것 같다. 


C5=암일 확률 95% 이상.


 나는 동네에서 가장 빨리 예약되는 H병원에 갔다. 촬영 검사지를 보고 심각해진 의사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심각하냐는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은 채 표정으로 힌트를 줬다. 어떻게든 희망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의사는 말했다. 전형적인 암의 모양과는 조금 다르다고, 조직검사를 해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혼자 예약증을 갖고 나오는데 아직 나에겐 5%의 희망이 있어서인지 완전히 무너지진 않았다. 남편에게 말했고 둘이 감당하기 어려워 부모님에게 말했다. 부모님은 H병원은 오진도 많고, 큰 병원도 아니라고 했다. 당신들이 아는 H병원의 카더라급 오진 이야기를 해주며 현실을 부정해 주었다. 그렇게 나와 당신들을 위로했다. 나에게는 암이 아닐 확률 5%와 H병원의 오진일 확률 두 가지 희망의 지푸라기가 있었다. 하지만 역시 5보다는 95가 더 큰 숫자였고 H병원은 오진 따윈 하지 않았다. 

나는 암이었다.

 새로 간 병원에서도, 또 다른 병원에서도 진단과 수술 방법은 모두 같았다. 유방암 0기였다. 0기, 즉 제자리암이지만 암세포가 얕고 넓게 퍼져 있어 전절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가슴의 모든 조직을 잘라내고 보형물을 넣는 동시 복원을 하자고 했다. 수술한 K병원에서는 전절제 수술만 하면 항암치료나 방사선 치료 같은 사후 치료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의사는 0기에 발견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라고 말했다. 행운을 강요당했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좋았다. 


 두 번째 갔던 A병원에서는 현재 진단은 0기지만 수술 후에야 최종 기수를 정확히 알 수 있고 만약의 경우 항암치료를 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런 재수 없는 말은 거르기로 했다. 내 유일한 행운에 부정이 탈까 퉤퉤퉤 침을 뱉고 싶었기 때문이다. K병원에서 진단한 대로 0기(제자리암)라서 수술만 하고 나면 항암치료는 안 해도 된다는 말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내가 암일 리 없다고 부정하던 단계가 지나자, 분노 단계에 이르렀다. 술, 담배도 전혀 하지 않은, 젊다 못해 어린 내가 대체 왜라는 생각에 화가 일었다. 너무 억울해서 세상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누구 때문이야, 이것 때문이야 같은 여러 이유를 찾아냈다. 지난 몇 년간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 힘들게 했던 상황들에 의식이 잠식당했다. 그리고 0기인 건 행운이라는 말들 되뇌며 마음속 분노와 극적 타결을 맺고, 그만 억울해하기로 타협했다. 그 후 우울 단계에는 빠지지 않기 위해 수술 날까지 안간힘을 다해 멘탈을 붙잡았다. 계속해서 생각했다. 수술만 하면 끝이다. 수술만 하면 더 건강하게,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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