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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사라 Jul 11. 2024

한쪽 가슴을 내주고 남은 것들

기껏해야 3회 초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 내 병을 숨기지 않기로 ‘결정’했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면 정말 아무런 일도 아닌 게 될 것 같아서 그랬던 것 같다. 이런 암밍아웃 과정에서 상처받는 일도 물론 있었다. 요즘 유방암 별거 아니라는 둥, 초기에 발견한 게 운이 좋다는 둥. 심지어 잘 좀 살지 왜 아프고 그러냐는 둥. 

 그들 나름의 위로였을지 모르겠지만 그땐 단어 하나하나가 비수가 되어 왼쪽 가슴에 꽂혔다. 그렇게 별거 아니고 운이 좋은 거면 그 행운 가져가시오 하고 싶었다. 괜히 암밍아웃을 해서 이런 소리나 듣고 있나 싶어 후회한 적도 있다.


 이런 나의 착잡하고 힘든 심경을 개인 블로그에 적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따뜻한 위로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병원에서 겪은 일, 자연치유를 고민하던 과정들을 적다 보니 비슷한 고민을 하는 암 환우들이 질문을 해오기도 하고, 자신이 하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암밍아웃 하기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 

  ‘병은 널리 알려라.’ 


 40대 후반에 암을 겪고, 이제 60이 넘은 엄마는 암과 싸우느라 50대를 몽땅 잃어버린 것 같다고 말 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60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50대 같다는 동안 소리를 들으며 살고 있긴 하지만. 완치판정을 받기까지 5년에서 10년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그 긴 시간 동안 암에 집중하며 암 중심으로 살다 보면 정말 말 그대로 시간이 녹아 없어진다. 그래서 내 소중한 30대를 잊지 않고 싶어 영상 기록을 많이 남기기로 했다. 

 

사실 특별한 의학적 치료를 받지 않고 혼자 치유하는 과정을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심리적으로 안심이 되는 효과가 있다. 세월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있다는 증거용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유튜브 영상을 남기고, 블로그에 글을 쓰고 이렇게 글을 쓰니 나의 하루하루가 사라지지 않고 기억되는 것 같아 의미가 있다.



 

 50은 되야 하늘의 뜻을 아는 지천명이라는데 고작 32살에 어떻게 살아야 될지 방향 정도는 알게 된 것 같다. 요즘은 120세 시대라지만 내 병력과 여러 가지 요인을 감안해서 99살쯤 산다고 치자. 야구로 치면 기껏해야 3회 초다. 야구만큼 끝날 때까지 반전의 기회가 많은 스포츠도 없다. 다행히 인생도 한 번의 점프, 한 발의 화살이 아니라 몇 번이고 역전의 기회를 주니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야구는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아 보이지만 매회 매초가 치열한 싸움이다. 3회 초인 지금은 부상 이슈로 살짝 불리하지만 금방 역전할 수 있다. 


 전 양키스 단장 게이브 폴은 이런 말을 했다. ‘야구가 위대한 점은 매일 위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위기 속에도 승부는 계속되고 끝은 있다. 한 회를 허투루 보내지 않고 촘촘하게 플레이하면 된다. 인생도 위대하다. 매일 위기가 존재하는데 매번 극복해 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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