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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아킬레스, 그리고 윤석열

우리가 원하는 지도자의 상

by 유꼭또


도덕적 위기의 시기에 중립을 지키는 자들에게 가장 어두운 지옥이 준비되어 있다.

(단테)


이준석 의원이 대통령의 의료개혁을 비판하며 “윤 대통령을 무모하게 돌진하는 돈키호테 같다고”(한국일보 2024 0902) 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말타고 달리다 우연히 마주치게 된 풍차(의료인들)를 세상의 질서를 해치는 거인(개혁을 방해하는 기득권세력)들로 착각하고 돌진하는 돈키호테가 충동적이며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며 일단 돌진하면 멈춤이 없는 무대포 스타일을 연상 시키는 윤통을 연상시킨다는 겁니다. 이 발언이후 포털 미디어 뉴스 댓글에 윤통을 돈키호테에 비유하는 표현이 가끔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윤통을 보면 돈키호테가 생각나는 건 사실입니다.

현실과 이상을 착각하는 돈키호테와 윤통. 그 이유도 서로 닮은 꼴입니다. 둘 다 한 종류의 책만 읽은 탓입니다. 돈키호테는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으고 집안의 온갖 가재도구를 다 팔아 한 가지 장르 책 (기사 로망스) 만 사고 읽습니다. 윤통은 사시만 9번을 떨어졌으니 무슨 책만 읽었는지는 언급 안해도 다 아시리라 믿습니다. 세르반테스는 50 넘도록 결혼도 안한 채 기사 로망스에 빠져 산 돈키호테의 뇌는 다 말라버렸다고 쓰고 있습니다. 윤통 역시 50 넘도록 노총각으로 법만 갖고 살았는데 돈키호테와 다른 점은 이미 말라버린 뇌를 검사 월급을 몽땅 털어 주기적으로 (결혼후 지금까지) 술통에 빠뜨렸으니. . . 한 사람은 세수대야와 투구를 또 한 사람은 세수대야와 냉면그릇을 구분 못하게 된 이유입니다. (편식이 몸을 해치듯 편독-- plus 알코홀-- 또한 머리를 망칩니다.) 그러나 둘의 닮은 점은 여기까지입니다.

돈키호테는 기사 로망스를 읽으며 기사의 이상에 감명을 받습니다. 돈키호테는 이제 스스로 기사가 되어 자신이 배운 기사 정신을 실천하려 세상으로 나갑니다. 기사는 불의에 분노하고 어려움에 빠진 이웃을 도와주고 늘 약자 편에 서서 싸워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하는 소명이 있습니다. 그는 어린아이가 매를 맞고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않으며 아랫사람에게는 따뜻한 "연탄" 같은 마음의 소유자입니다. 돈키호테는 귀족들과 식사자리에서 산초가 자신과 함께 앉아 식사하기를 꺼리자 이렇게 말합니다.

이 고귀한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는 자리에 나는 그대가 내 옆에 앉기를 바라네.

자네는 자네의 주인이자 귀족인 나와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하네. 내가 사용하는

똑같은 접시로 먹고 같은 컵으로 마셔야 하네. 그래야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나의 기사도 정신을 경험할 수 있지 않겠나? (1861)


산초는 배부르게 먹을 수만 있다면 혼자 먹어도 상관없고 서서 먹어도 상관없다고 거절합니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산초를 기어이 옆자리에 앉혀 식사를 하게 합니다. 돈키호테는 산초뿐만 아니라 다른 하층민에게도 똑 같이 대합니다. 그는 자신의 신조를 이렇게 이렇게 말합니다.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 그것이 나의 임무이다.

(“To dream the impossible dream, that is my quest.”)

나는 내가 누군인지 그리고 내가 누가 될지도 안다. 그건 내 선택에 달려있다.

(“I know who I am and who I may be if I choose.”)


여기서 불가능한 꿈은 신분의 귀천이 없는 모두가 평등한 사회의 건설입니다. 이는 1605년의 유럽에서는 임파서블 드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반문합니다. “어떤 게 미친 행동인가? 주어진 대로 사는 건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세상을 스스로 만들어 사는 건가?” 돈키호테가 전파한 건 나의 정체성 나의 신분은 내가 스스로 정해야 한다는 "꿈"이었습니다. 타고난 신분의 틀 안에서 살기를 강요하던 그 시대에 세르반테스가 던진 화두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평등한 세상의 시작. 바로 돈키호테가 추구한 불가능한 꿈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법의 세계에 경도된 윤통. 그러나 그에게 법은 공정과 상식의 도구가아니라 사람을 길들이는 수단입니다. 마치 견주가 댕댕이를 개껌으로 좌로 구르고 우로 구르게 만들듯이 말입니다. 정적 혹은 미래 정적을 치는데는 법을 한없이 엄격하게 자신의 부인을 지키는데는 한없이 물렁하게 적용합니다. 게다가 조선 왕조가 멸망한 지가 언제인데 손에다 왕자를 쓰고 나와 마치 왕이나 된 듯 안하무인으로 거들먹거리는 윤통, 구두 신은 발을 기차 좌석 위에 올려놓고 시시덕 대며 시도 때도 없이 비속어를 남발하고 윗사람 아랫사람 할 것 없이 반말로 하대하는 윤통, 노동자 계층은 무시하고 억압하지만 권력자들과 재벌들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너그러운 윤통, 국민에게 꿈을 심어주기는커녕 선거 유세 때나 지금이나 불과 며칠 전에 자신이 한 말도 기억 못 하는 밥통 같은 윤통의 이름을 모든 인간을 사랑하고 껴안은 돈키호테와 나란히 놓는 행위는 420년간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아 온 라만차의 기사를 모욕하는 일입니다.

윤통은 차라리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비극의 주인공 아킬레스입니다. 가진 건 힘과 분노뿐인 아케아 영웅의 이야기를 다룬 일리아드. 그 시작을 읽어봅니다.

나의 주제는 아킬레스(윤통)의 분노. 제우스(사주팔자)의 뜻대로 그 치명적인

분노가 아케아인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고 많은 귀족들의

용감한 영혼(정경심, 조국 등) 들을 지옥(감옥)으로 보냈고 . . .

( 『일리아드』, 23)


리더의 분노로 인한 내분으로 시작되는 일리아드. 트로이를 쳐들어온 아케아 연합군의 전사 말하자면 계열사 사장 격인 아킬레스가 전리품 배분의 문제를 놓고 그룹 회장 즉 총사령관격인 아가멤논과 틀어지자 그는 지체 없이 전쟁(근무) 보이콧을 선언합니다. 여기에서 아킬레스가 제기한 문제점은 회장의 불공정과 갑질의 문제입니다. 아킬레스는 자신이 열심히 싸워 전리품을 챙겨왔는데 막사에서 술 먹고 놀기만 한 사령관이 그 걸 차지하는게 말이 되는가 따집니다. 그러나 아가멤논도 할 말이 있습니다. 트로이와 전쟁 사업의 최대 투자자인 자신이 제일 많이 차지하는 게 너무 당연하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렇게 싸우게 된 두 전사. 아킬레스가 전쟁 사업에서 철수를 선언하자 트로이와 전투 중이었던 고대 그리스 연합군은 자중지란에 빠지며 수세에 몰리기 시작합니다. 맘대로 해보라며 큰소리쳤던 아가멤논부터 참모, 원로급 전사, 아킬레스 부친의 친구까지 전부 나서서 아킬레스를 설득하지만 역부족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분을 삭이지 못해 계엄령을 내린 윤통. 이 사건은 대한민국 판 일리아드입니다. 윤의 내란 역시 아킬레스처럼 민주당과의 분쟁으로 시작되었으나 이제 그의 상대는 국민과 그리고 민주주의 가치입니다. 윤통 분노의 시발점도 이거 저거 있지만 결국 전리품(예산) 문제입니다. 계속되는 특검에 (거부권을 계속 쓴건 쏙 빼고) 자기가 쓸 돈을 깍으니 빡쳐서 말도 안 되는 부정선거 끼어넣어 헌정질서 수호 운운하면서 계엄을 선포합니다. 우리도 아케아군이 트로이와 대치하고 있듯이 현재 북한과 대치중인 엄중한 상황 중에 말입니다. 나라를 세계의 웃음거리로 만든 윤통의 계엄선언 트리거는 취임 이후부터 자주 언론에 등장했던 그의 격노입니다. 그 분노가 차곡차곡 빌드업되다 마침내 폭발한 겁니다. (어쩌다 아내와 싸우는 내 모습임을 고백합니다) 게다가 윤통도 아킬레스처럼 고집불통입니다. 윤에게 충고하는 일은 벽과의 대화로 보입니다. 아킬레스는 분노하다 결국 (절친의 죽음으로) 분노에 차서 전쟁터에 다시 나가고 결국 분노 속에 삶을 마감합니다. 윤통이 곧 따라갈 코스입니다. 분노 조절에 실패한 남자는 사귀던 여친을 죽이며 가장은 가정을 파탄 내며 사장은 회사를 말아먹으며 국가의 리더는 나라를 절단냅니다. 정치가 흔들리니 환율도 오르고 원자재 수입 업체는 울상이고 연말연시 예약취소에 음식점 사장님들은 한숨을 쉬며 국민들은 연일 탄핵을 외치며 불안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지도자는 모든 걸 남 탓하며 대화 없이 혼자 분노로 치를 떨다 국회에 군대를 보내 결국 국민만 개고생시키는 인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약자에게 약하고 강자에게 강한 지도자를 원하며 모든 국민들을 가슴에 품고 사랑하는 지도자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그런 꿈을 선물하는 지도자를 원합니다. 국민들을 분열시키며 만사형통대신 고통을 선사한 윤통에 대한 정의 실현을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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