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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처돌이 Oct 26. 2021

유지어트는 쉬울 줄 알았는데: 철새 운동인의 슬픔

36kg를 감량한 탄수화물 중독자의 유지어트 이야기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내 옷장은 간신히 발을 맞췄다. 주말 내내 옷 정리를 고민하다 미적미적 겨울 니트며 외투를 꺼내다 걸어놓았는데 정말이지 생명을 살린 판단이었다. 가을 정취라곤 눈꼽만큼도 느낄 수 없는 출퇴근길에 코트는 사치다. 나는 비만인 시절부터 지금까지 추위를 엄청나게 탄다. 흔히 살이 찌면 추위에 강하고 더위에 약하다는 편견이 있는데, 내 경우에 비추어 보자면 하나도 안 들어 맞는다. 심지어 땀조차 잘 안 흘린다. 살과 추위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강력한 증거인 셈이다.


날씨가 본격적으로 추워지면 나는 정말이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안락하고 따뜻한 집 안에서 겨울을 나고 약속은 최대한 줄인다. 수족냉증도 심하다보니 샤워때마다 얼음속에서 깨어난 캡틴 아메리카마냥 다시 살아나는 것 같다. 차라리 겨울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웃풍을 차단하는 암막 커튼과 극세사 이불, 온수 매트까지 꺼내면 주말 내내 웅크린 곰처럼 누워있다. 식사도 무엇도 필요없는 보드랍고 따뜻한 안락함. 강철같은 정신력은 없지만 느릿하니 질척한 끈기 하나는 자부하는 나도 겨울에는 두손 두발 모두 들고 야외 운동을 포기한다.


벌써 찬바람이 부니 잠시 맛을 들였던 야외 달리기나 마라톤, 심지어 런데이도 모조리 취소했다. 기껏 마련한 러닝화나 운동용 겉옷도 전부 역사속의 유물로 사라진다.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에 다시 만나야 하는 물건들이다. 잘 갈음해놓고 이제 다시 새로운 실내 운동을 찾아 두리번 거리는 시기다.


철새도 겨울에는 남쪽으로 떠나듯, 대다수의 생활 운동인들도 헬스장이나 실내 체육관을 찾아 사라진다. 찬바람이 불자마자 제법 북적이던 저녁시간 산책로의 인파도 절반 이상 줄었다. 강아지들의 성화에 못 이겨 끌려나온 견주님들의 옷도 아주 두툼해졌다. 왕좌의 게임에 등장하는 명대사가 생각난다. winter is coming.  


대체 다이어트 하기 좋은 계절은 언제일까? 최고의 계절은 없지만 최악의 계절은 있다. 나는 단연코 겨울은 살을 빼는데 최악의 시기라고 생각한다. 겨울을 건강하게 나며 체중 유지만 해도 박수를 받아야 한다. 일단 몸이 축 처지는데다가 더위는 밤이 되면 가신다지만 추위는 밤이 될수록 맹위를 떨친다. 추운 곳에서 운동을 하는건 부상을 입기 딱 좋다. 게다가 겨울 간식은 다른 계절보다 훨씬 맛있다. 기분 탓일까? 아니면 추위라는 혹독한 계절을 나기 위해 인류가 겨울에는 식욕이 솟구치도록 진화한 것일까? 타고난 식욕을 계절 탓으로 돌리려는 나의 비겁함이란...  


겨울하면 또 귤이다. 어릴때부터 나는 귤을 유독 좋아해서 과거 비만인 시절에는 앉은 자리서 열개(!)쯤 뚝딱 해치웠다. 사실 과일의 칼로리는 계산하기 어려운 법이다. 유지어트를 하는 지금은 하루에 딱 2개로 제한하고 꾹 참는데, 이게 참 괴롭다. 신 과일은 먹을수록 식욕을 당기게하는 무서운 매력이 있다.


게다가 나는 빵처돌이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변 친구들이 종종 빵이나 디저트 맛집을 물으면 늘 적재적소의 가게를 검색하거나 다녀온 곳을 알려주는걸 삶의 낙으로 삼는다. 가끔 친구들은 늘 먹었던 빵중에 어디가 제일 맛있었냐고 묻는다. 나는 늘 수많은 리스트 사이에서 최고의 가게를 고민했으나, 갑작스런 한파가 불어닥친 며칠 전에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집에 가는데 딱 현금 이천원이 있어. 근데 버스정류장에 붕어빵 포장마차가 있는거야."


더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게임은 끝났다. 차가운 바람을 피해 비닐 포장마차로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훈훈한 기운. 적당히 데면한 사장님의 돈통에 천원짜리를 넣고 오백원을 알아서 거슬러 가진다. 갓 구워낸 바삭한 붕어빵은 마치 손난로 같다. 기름을 발라 구워낸 잉어빵도 좋고, 기름 없이 구운 담백한 붕어빵은 더 좋다. 붕어빵이 다 같은 붕어지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늘 친절하게 답했다. 아이스 커피에는 붕어빵, 따뜻한 커피에는 잉어빵이라고. 기름기 있는 잉어빵과 차가운 커피를 같이 먹으면 입 안에 기름기가 남기 때문이다. 나는 탄수화물에는 한없이 진지해지기 때문에 나름의 기준을 아주 잘 세워놓았다. 내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빵이나 디저트를 먹으면 우울해지기까지 한다. 이런걸 먹기 위해 운동하지 않았다. 나는 더 맛있는 빵을 먹을 권리를 위해 다이어트를 해냈다.


어쨌든 이 모든 간식의 유혹과 겨울에 유독 맛있어지는 음식들, 추위와 수족냉증, 퇴근 후에 더욱 늘어지는 몸과 추위를 이겨내며 롱패딩 차림으로 실내운동을 위해 종종걸음을 쳐야하는 겨울은 다이어터에게 너무 가혹하다. 그래도 해야하는게 인생의 아이러니다. 하기 싫다를 백번쯤 외고, 엄마한테 내가 만약 운동을 나가지 않는다면 나를 쫒아내라는 살벌한 부탁과 함께 밥 먹고 미리 운동복 입고 있기 같은 투쟁을 거치고 나서야 찬바람이 부는 바깥 세상으로 위대한 한 발짝을 내딛는다.  


얼마 전 고민 끝에 필라테스를 재등록 했다. 아닌게 아니라 3~4개월 정도 달리기를 하느라 잠시 필라테스를 쉬었다. 살짝 매너리즘이 느껴지기도 했다. 게다가 필라테스는 숨이  끝까지 차는 격렬한 유산소가 아니라 나를 서서히 죽음에 가까운 (하지만 절대 죽진 않음) 고통으로 몰아가는 전신 운동이다. 근육통을 늘 달고 사는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나는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우스갯소리로 필라테스를 하러갈 때마다 '기름짜러 간다' 라고 칭했다. 이상야릇한 기구에 매달려 뻣뻣한 몸을 쥐어짜내고 있자니 정말 몸에서 참기름을 짜내는 기분이 든다. 타고나길 내향적인 나는 혼자 하는 운동이 좋지만 필라테스를 끝내고  태어난 사슴처럼 벌벌대는 감각이 슬슬 그리워지기도 했다. 잠시 후에는 내가 드디어 미쳤구나 싶었다. 세상에 그리울게 없어서 필라테스가 그립다니? 하지만 현대인의 고질병이라는 뒤틀린 골반과 거북목엔 필라테스만한 운동도 없다.


친절하고 사근사근한 상담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적지 않은 금액을 일시불로 긁어버렸다. 나름 오래 다녀서인지 두런두런 스몰토크도 하고, 늘 향기롭고 적당한 온도가 유지되는 필라테스 룸을 다시 보니 살짝 의욕도 솟는다. 계절마다, 분기마다 재등록을 고민하며 때로는 다른 운동을 찾아 훌쩍 날아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내 모습은 마치 철새같다. 어느 운동 하나 진득하게 못하고 촐싹대며 뭐가 더 재밌는지, 뭐가 덜 힘들면서 운동 효과는 좋은지 기웃댄다. 이토록 운동을 싫어하는 내 성향이 가끔은 싫을때도 있다. 운동을 얼추 2년 넘게 해오고 있으면서 대체 언제쯤 기꺼이 운동을 나가는 날이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가끔' 운동이 즐거울 때도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안 나갈 수 있다면 안 하고 싶다. 여전히 내 몸은 뻣뻣하고 스트레칭을 할 때마다 뼈가 우두둑댄다. 하지만 이상은 너무 높아서, 한 가지 운동에 몇 년이고 몰두해서 나름대로 특기라고 이름을 댈만한 실력으로 키우고 싶다.


하지만 이런 조급함이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은 결국 운동무용론으로 이어진다는   안다. 뭐든 안하는거보단 일단 하는게 낫다는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는데도 때론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 찌는 몸이나 운동을 안 해도 탄탄한 근육질을 갖고 싶다는 헛꿈을 꾼다. 그래도 하기 싫은 운동을 꾸역꾸역 하는 것도 미련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계절마다 새로운 운동을 검색해보거나  근처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센터가 생긴걸 기억해 놓는다. 주변 친구들에게 뭐가 재밌는지 염탐하고 시범 수업도 들어보며 열심히 뭐라도 한다. 철새라고 불러도 어쩌겠는가. 따뜻한 남쪽을 찾아 떠나는 새들처럼 나도 언젠간 나에게  맞는 운동을 만날때가 있겠지 고대하며 올해 겨울을 나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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