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동안 250켤레의 토슈즈를 신은 발레리나
우리 아이는 발레를 정말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4살 때부터 문화센터에서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아직 1년이 채 안되었지만 진지하게 임한다. 발레 교재에 있는 QR코드로 무한 복습을 하고, 유튜브 영상을 볼 때도 발레, 체조, 피겨스케이팅을 보여달라고 조른다. 친구들과 음악에 맞춰 막춤을 출 때도 손끝, 발끝까지 나름 심혈을 기울여 표현한다.
반짝 흥미를 보이다 말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어른까지 발레를 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5살 딸 아이를 보니 '나중에 정말 발레를 진지하게 한다고 할 수도 있겠구나'는 생각이 들면서 발레에 대해서 알아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발레단의 생활을 담은 다큐멘터리, 유명한 발레리나들의 인터뷰 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내가 상상했던 발레리나의 모습은 여리여리한 몸과 부드러운 동작 만큼 섬세하고 연약한 화병의 꽃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영상을 통해 본 발레리나의 실제 모습은 완전히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꽃보다는 무술을 연마하는 전투사에 가까웠다. 발이 부르트고 허리, 무릎의 부상으로 아픈 곳이 있어도 거르지 않고 매일 같은 연습실에 출석해 딱딱한 토슈즈를 신고 전날과 똑같은 동작을 연마하고 있었다. 부상과 싸우며 묵묵히 걷는 수행의 길 위에서 발레리나는 마치 본인에게는 중력이 다르게 작용한다는 듯이 환상 속에 나올 법한 비현실적인 동작을 인간의 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런데 더 놀라웠던 건 매일 얼음물을 가득 담은 양동이에 발을 담궈야 할 정도로 근육 염증에 시달리고 소염진통제를 달고 살아도, 인터뷰를 하는 발레리나, 발레리노들은 모두 발레가 좋아서, 발레하는 순간이 행복해서 발레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이렇게 연습할 수 있는 것이고, '이걸 왜 하고 있지?'라는 의문도 없으며,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 감사하다는 얘기를 했다. '발레'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그들은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발레리나들의 모습을 보며, '과연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걸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발레를 해본 적 없는 제3자가 보았을 때, 10대 또는 그보다 어린 나이 때부터 걷는 무용수의 길은 끊임 없이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하는 고행의 길로 보였기 때문에, 그 행복한 미소가 언뜻 이해되지 않았다. 부르튼 발과 그들의 행복한 미소가 잘 연결되지 않았다.
예전에 어떤 다큐멘터리에서 행복은 '갖고 있는 것'/'원하는 것'이라는 연구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이 공식에 따르면 '갖고 있는 것'이 많을수록 행복할 수는 있겠지만 '원하는 것'이 그 이상이면 그럼에도 불행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갖고 있는 것'이 적더라도 '원하는 것'이 소박하다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그 다큐를 처음 봤을 때는 단순히 '그래 너무 욕심을 내면 안 되겠다, 적당히 원해야 행복할 수 있는거구나'라고만 결론내렸다. 욕망을 제한하고 억제하는 것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너무 큰 꿈은 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큐를 통해 본 발레리나들의 모습을 보며 행복한 것과 큰 꿈을 갖는 것은 함께 할 수 없는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들은 하루하루 고되지만 행복한 삶을 살면서도, 예술가로서의 무아지경의 경지, 완벽한 무대를 꿈꾸고 있었다.
행복이 '갖고 있는 것'/'원하는 것'이라면, 원하는 것을 제어하면서 갖고 있는 것을 늘려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핵심은 '원하는 것'이었다. 분모인 '원하는 것'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분자로 오는 '갖고 있는 것'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즉 분모에 오는 원하는 것이 건강이라면 분자에는 현재 나의 건강상태가 될 것이고, 분모가 재력이라면 분자는 현재 나의 자산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무엇을 원할 것인지가 내가 무엇으로 행복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따라서 내가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 먼저 잘 파악을 해야 전략적으로 내가 무엇을 가져야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된다. 그 반대가 되면 행복에 있어서는 굉장히 비효율적인 삶을 살게 된다. 예를 들어 나는 다양한 경험을 더 중요시 여기는 사람인데 더 높은 연봉을 원하는 것이라고 착각해서 매우 루틴하고 제한적인 업무반경을 가지는 일을 한다거나, 나는 가족과의 시간을 더 중요시 하는 사람인데 사회적인 인정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라고 착각해서 경쟁이 치열해 업무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아야 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갖고 있는 것'을 '원하는 것'에 맞춰 늘려가지 못하거나 오히려 줄이니 행복감이 커질 수 없다.
결국은 행복해지려면 '원하는 것'에 대한 나만의 정의를 내려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타인의 욕구, 타인의 욕망을 나의 것으로 착각하지 않고, 내 내면 깊은 곳으로 가서 발견한 나만의 욕구, 나만의 욕망을 발견해줘야 한다. 발견한 나의 욕망, 나의 가치관에 따라 나만의 기준과 우선순위를 재정립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내가 무엇을 가질지 선택하고 실행해야 비로소 행복의 열매가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타인의 욕구, 욕망에 맞춘 기준과 우선순위로 살아가게 되면,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들이는 노력에 비해 이상하게도 수확하는 행복의 열매는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감히 생각하건대, 모든 발레리나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발레단에 입단하여 무용수의 길을 걷고있는 발레리나들 대부분이 발레를 할 때 행복하다고 하는 이유는 자신이 무엇보다 춤을 추는 것을 원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자신만의 기준에 따라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시선을 생각할 틈 없이, 각자 맡은 역할을 잘 해내기 위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해나간다. 실수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연습하고 또 연습한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면 그동안의 경험에서 축적된 연륜으로 더 깊은 감정 연기를 하게 된다. 이렇게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경험을 수십번, 수백번, 수천번, 어쩌면 수만번 했을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단단한 신뢰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의 횟수가 하나씩 추가될 때마다 그 다음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의 뿌리가 하나씩 자라나서, 어떤 시련과 고난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커다란 뿌리를 가진 거대한 나무가 되어있을 것이다. 이렇게 큰 나무가 될 때까지 필요했던 것은 매일매일 그날 세운 자신만의 기준을 채우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만의 기준. 그것은 클 필요가 없었다. 하루하루는 평범했다는 강수진 발레리나의 말처럼 말이다.
하루하루 만족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원하는 것'에 대한 나만의 정의를 내리고, 오늘 하루 동안 내가 달성할 수 있는 나만의 기준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하나, 또는 두개가 무엇인지 명확히 하고, 그것을 위해 오늘 투자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가 얼마나 있는지 살펴보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 이것이 하루하루 나를 사랑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예를 들면 워킹맘, 워킹대디이지만 가족이나 아이가 1순위라면, 내가 저녁은 꼭 아이와 먹는다거나, 자기전 1시간은 하루 있었던 일을 나누거나 책을 읽어주는 등 정서적으로 충분히 교류하는 시간을 갖는다거나, 등원이나 하원 중 하나는 꼭 한다거나 하는 내가 지킬 수 있는 기준을 설정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기준을 정해두지 않으면 다른 중요하지 않은 일이 내 시간을 차지해버리거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음에도 나를 자책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만의 기준을 만들어둔다면, 그 기준을 달성한 나 자신을 칭찬해줄 수 있고 나 자신에 대한 믿음도 키워나갈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준을 달성할 수 있었음에 감사할 수 있게 된다. 나에게 중요한 가치가 건강이라면, 하루에 한끼는 건강식으로 먹는다거나 30분이라도 산책이나 계단 오르기를 하기로 나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볼 수 있다. 만약 중요한 가치가 시간적인 자유라면, 나에게 자유를 늘려줄 수 있는 직장이나 프리랜서 일을 하루에 30분씩 알아보거나 준비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을 나만의 기준으로 세울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추구하는 가치에 부합하는, 내가 하루 동안 달성할 수 있는 나만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내가 무엇을 잘해내지 못했거나 의지가 약하기 때문에 나는 가치 없고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내가 나를 평가할 기준을 애초에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을 남들의 평가에 힘없이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할, 그리고 믿어줄 근거를 만들기 위해 나만의 기준을 세워야 한다. 작고 소소하더라도 그 기준을 달성하면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기고 나에 대한 믿음의 뿌리가 자라게 된다. 그렇게 하루하루 보내다보면 발이 부르트고 뭉그러져도 행복한 미소가 가득한 어느 발레리나처럼, 어떤 시련과 고난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커다란 뿌리를 가진 나무가 되어 나만의 향기와 열매와 잎과 꽃들을 풍성하게 담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