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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는 윤별경 Aug 30. 2024

남을 잘 울리는 여자!

공감능력 만렙 말고 사고능력을 키우자.제발~~


남을 잘 울리는 편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이야기를

잘 털어놓는다.

리고는 나에게 눈물을 보인다.

소리 내어 엉엉 울기도 한다.


 

이야기를 들으며

내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열심히 들어주는 것뿐이다.

중간중간 추임새만 넣을 뿐이다.


"힘드셨겠어요. "

"저도 이렇게 힘든 마음인데

어떻게 견뎠어요?"

"다는 알지 못하지만,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아요"

그 말뿐이다.

그리고 토닥토닥거려 주는 것

그것뿐이다.


공부를 많이 한

정신의학과 의사도 아니며

더더욱 심리상담사도 아니다.

방향지시나, 해결책을 내려줄

전문적인 지식은 나에겐 없다.


그저 들어줄 뿐이다.

친구 때문에 아팠다거나

남편이나 시댁식구 때문에

힘든 마음들을 털어놓기도

하였고, 직장생활 속에 빌런들

때문에 힘든 이야기도 들었다.


나에게 이야기를 하면

나는 그분의 입장이 되어

너무나 쉽게 공감을 한다.

문제는 내가 너무나 아프다는 거다.

며칠 동안

이야기한 그분

빙의라도 된

아프고 아프다는 거다.


어떤 분은 남편 외에 연하남을

사귀며 가족들이 알게 되어

어느 누구도 이별을 하지 못해

같은 아파트 다른 동에서

이중생활을 하는 분의

이야기를 나에게 한 적도있다.

오죽하면 시어머님도

"3번째 남편은 들이지 마라"

하셨다고 했다.

그분의 이야기는 공감을

지 못한 유일한 분이었다.


내게 울림으로 남아있던,

나의 인연들의

이야기를 꺼내볼까 한다.




몇 년 전 

사무장으로 근무할 때였다.

어느 토요일 오후.

사무실 문을 열고

"사무장! 안녕"

환한 미소로 인사하는 어르신을

맞이하였다.

칠순나셨지만, 가녀 몸매에

얼굴도 고우시고 항상 미소를

지니신 분이셨고, 단아시며

중후한 노년의 삶을 사시는

분이셔서 나는 늘 그분을 존경했다.


가지고 있던 성경책이 오래되어

낡아서 사러 오셨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하다가,

아들안부를 물으시길래,

(그 아들 입대하여

훈련병 일 때였다.)

"엄마 마음이 그렇네요

적응하며 지내고 있는지

걱정 요."


"내가 그 마음 잘 알아!

난 딸 둘밖에 없는데

큰애가 수녀님된다고 수녀원

갔을 때도 마음 조금 아팠어.

렇지만 하느님의 뜻이거니

마음을 달래며 지냈는데,

 년 있다가 작은딸도

수녀님이 된다고 했을 때

마음이 무너졌어.

내가 하느님을 믿고 그 믿음이

큰 의지가 되지만, 딸들이

결혼하지 않고 하느님을 따르며

살아가겠노라고 했을 때

엄마로서 너무 아프고 힘들었어."


고운 얼굴 눈물을 흘리시더니

아이처럼 엉엉 우시기 시작했다.

엄마의 마음이기에,

난 그날 어르신을 꼭 껴안고

같이 울었다.


몇 달 전

성당에 미사 보고 난 후

몇 달간 다리수술로 성당에

오시지 않은 그 어르신을 보고

반갑게 인사드렸더니

나의 손을 잡으시며

"모니카(나의 세례명)

00에 근무한다고 들었어"

어떻게 아셨냐고 여쭤보니

"우리 큰 수녀님이 거기

사무국장으로 있어.

모니카 거기 근무다고

이야기하더라. "

아. 예!하며

인사드리고 나왔었다.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걸

모른척하고 으며 그럴것이다.


내년 2월이면 어르신의

큰 따님이신 수녀님은

4년간의 소임을 다하셔서 다음

임지로 발령받아 가시게 된다.

낮은 대로 임하시는 수녀님의

사명에 항상 기도를 하고 있다.




16년 전 그녀를 만난 건

요양병원 근무할 때였다.

간호조무사 자격을 따고

갓 입사한 신입이었다.

난 그 샘을 데리고 다니며

가르쳐주는 선배였었다.

웃음기가없고 그늘이 있어보여

같이 일하며 다녔지만,

어쩔수 없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곤 하였다.


시간이 흘러

나는 공부를 더 하고싶어

간호과장님과 이사장님의 배려로

나이트근무를 전담하며, 낮엔

간호학과를 다니게되었다.

죽어라 공부하였고,

다른동료들의 배려를 잊지

않기위해 쪽잠을 자며 근무를

해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를 곱지않게 보는

시선들도 있었다.

시샘과 질투로 뒤덮여진 시선들.


'지가 얼마나 잘난지보자.

조무사주제에 구 용쓴다.

아마 간호과장에게 돈을주고

나이트전담하거나, 이사장과

그렇고 그런사이 아닐까?'


소문은 꼬리를 물며

사실처럼 되어 가고 있었

그 중에 특히 그 샘도 나의

이야기를 가십거리 씹고

다닌다는것을 알고 있었다.


난 어떤대응도 하지않았고,

힘든마음에 많이 울었지만

아들에게 부끄지않게,

내 일을 해나가야하는 엄마이기에

공부를 하면서 일을 해 나갔다.

시간이 흐르자

소문들도 잠잠해졌고,

응원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4년후

그녀가 퇴사한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녀가 나에게


"샘! 샘을 알면 알수록

이렇게 진국인 샘을

다른사람의 말만듣고 나도 욕하고

다녔네요. 진심으로 미안해요!

제가 다른병원으로 가게되었어요.

샘이 가르쳐준대로 일을

잘 해나갈께요! 고마웠어요"


남편의 바람과 폭력으로

얼룩져야했던 그녀의 이야기에

고단했던 삶에

어쩌면 가십거리로 질투와

시샘으로 스트레스 풀지 않았을까?

나는 그녀를 미워하지 않고

그녀의 삶을 응원하고 있었다.

난 누굴 미워하는것을 극도로

힘들어 하는 사람이니깐.


우린 지금도 연락하며

가끔씩 만나서 수다를 떨고있다.

그녀는 그 후 이혼을 하였고,

싱글의 삶을 잘 살아가고있다.

열심히 절에 다니며, 요즘 금감경을

필사하는중이라며 카톡으로

자랑하며 나에게 사진을 보낸다.


가을이 오나봅니다~~

나의 이야기를 누구에게

털어놓고 해 본적이 없다.

이혼을 했다는걸 아는분들

많지만, 왜 그런선택을 했는지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궁금해 하는분들 직접 나에게

물으면 간단하게 이야기했었다.

들어주는 능력은 있지만,

나의 속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아주 많이

아팠는지도 모른다.


브런치는 나의 아픔의 공간이었다.

나의 글에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귀를 기울어주며,

토닥토닥거려준 작가님들이

계셨기에 내가 살  있었던

을 제대로 쉬는 숨통이

나의 진통제이다.


오늘 퇴근길에

같이근무하는 선생님이

"선생님 내일 시간있으면

제 이야기 들어주실래요?"

20살이나 어린 선생님이

나에게 인생고민이 있다고했다.


제발!

아프지 않는 이야기 이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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