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웠던 만큼 고마워.
오늘은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한때는 남편이 죽을 만큼 미웠다. 아니,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10년이 넘는 결혼생활동안 좋은 날만큼이나 좋지 않은 날들도 많았다. 절반의 세월은 남편을 미워하며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고 나쁜 말을 던졌다. 당장이라도 갈라설 것처럼 날을 세우고 서로를 비난했다.
내가 날 수 있게 날개가 되어주겠다던 그는 더 이상 내 곁에 없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날갯짓은커녕 걸을 수조차 없게 됐다. 제발 스스로 걷게만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그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필터를 거치지 않고 뱉는 그의 말 한마디에도 나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존중받지 못한다는 생각은 나 자신을 조금씩 무너뜨렸다. 세월이 흐르며 나는 딱딱해지고 메말라갔다. 그랬던 그가 변했다. 원래도 가정적인 사람이었지만 요즘은 조금 더 채워진 느낌이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나와 많이 다른 건 여전하지만, 적어도 더 이상 내게 상처를 내진 않는다. 말 한마디도 신중하게 하려고 애쓰는 게 눈에 보인다.
내게 병원에 가보라고 한 것도 그였다. '너도 정상은 아니잖아?' 하는 꼬일 대로 꼬여버린 내 마음이 길길이 날뛰기도 했지만 한 달이 조금 넘은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는 내게 고마운 존재다. 도움이 필요한 상태란 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병원과 상담센터 문턱을 넘지 못했던 내가 용기를 낼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병원과 상담센터를 오가며 나눈 이야기들을 그에게 전하면서도 되려 내게 그 화살이 돌아와 상황이 악화되면 어쩌나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가 우려했던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내 우울의 원인에 그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 스스로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서서히 변하고 있다.
"내 정신상태라고 자기와 크게 다르겠어? 나도 불안한 사람이고 문제가 많은 사람이지."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했다. 그가 달라졌다. 지금도 달라지고 있다. 솔직한 그의 말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아마도 나는 이렇게 솔직한 그의 태도와 말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공감과 위로가 필요했던 것 같다.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진정한 내 편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그동안 주말이면 무조건 온 가족이 다 같이 움직이는데 익숙했다. 한 번도 먼저 나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자고 한 적이 없던 그였는데 이젠 그가 먼저 나와의 시간을 챙기기 시작했다.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만들려고 하고 있다.
이런 그의 변화와 노력이 고맙다.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나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노력하려는 만큼, 힘든 시기를 보내는 만큼 그도 노력하고 있고, 나만큼 힘들 것이다. 아주 작은 노력들일지라도 이렇게 함께 하다 보면 조금씩.. 조금씩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