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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렉싱턴 Sep 26. 2015

'약한 건축'으로 말하는 겸손함

구마 겐고, <나, 건축가 구마 겐고>

  삶의 한 부분에서 어떤 울림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을 수도, 혹시나 음악이, 어쩌면 책이 있었을 수도 있지요. 저에게 '건축은 정말 멋지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책이 있습니다. 최경원 님의 'Great Designer 10'입니다. 저와 건축의 첫 만남으로 기억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 10명을 통해 문외한에게도 디자인에 대해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주었던 책입니다. 필립 스탁, 조르지오 아르마니, 이세이 미야케 등 디자인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디자이너 중에서도 특별히 저에게 영감을 준 것은 르 코르뷔지에와 안도 다다오, 두 명의 건축가입니다. 그 전까지 건축은 저에게 어쩌면.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전까지는 건축이라 하면, 글쎄요.. 특별히 떠오르는 게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그 책을 읽은 후에는 뭔가 건축을 좀 알게 되었다는 느낌마저 갖게 되었습니다. 저자분께서 참 대단하시죠. 책 한 권으로 디자인, 건축을 이렇게나 친숙하게 만들 수 있다니요. 오래 전에 읽었지만 다시 읽고 서평을 남겨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나, 건축가 구마 겐고. 이 책은 아마도 출판사의 시리즈 기획물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이 책 전에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를 먼저 샀거든요. 건축을 좋아하게 됐지만 사실 별로 아는 게 없으니, 이번에도 '건축가'에 대한 책을 읽어 보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안도 다다오는 세계적인 건축가이고, 대단히 독특한 인물입니다. 정규 건축 교육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권투 선수 출신입니다. 르 꼬르뷔지에로부터 영감을 얻었고, 세계를 돌며 독학으로 건축을 공부했습니다. 드라마틱하지요. 구마 겐고의 말에 따르면 '기존 권위에 대해 떠돌이 무사처럼 반기를 들었다'라고 불린 세대입니다. 안도 다다오의 저서에서는 스스로의 건축 사무소를 게릴라 집단으로 칭합니다. 장인들에게 호통도 많이 친 것 같은 엄격한 느낌입니다. 책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도 엄격하고 딱딱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절반밖에 읽지 못했습니다.


  반면 구마 겐고의 책은 많이 달랐습니다. 표지 디자인부터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릅니다. 안도 다다오의 책은 빛의 건축가라는 별명답게 강렬한 표지입니다. 하지만 구마 겐고는 같은 흑백이긴 하지만, 푸근한 느낌입니다. 문체도 편안하구요.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책에서 풍기는 분위기의 차이만큼, 구마 겐고는 안도 다다오와는 시작도 다릅니다. 일본 도쿄대학교 건축학과 출신이고, 대기업 근무 경험도 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 유학도 가게 되지요. 어찌 보면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흔한 엘리트의 전형적인 코스인 것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어쩌면 성격과 여러 가지 면에서 달라 보이던 그와 안도 다다오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건축가가 되는 공통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도 있을까요. 기존의 것을 부정한 것입니다. 그는 아메리칸 드림, 콘크리트, 샐러리맨을 부정함으로써 20세기 건축에 반기를 듭니다. 안도 다다오의 다음 세대이자, 회사 생활도 해보고, 미국 유학도 간 사람이 말이에요. 건축을 배우지 않은 無의 상태에서 기존과는 다른 건축의 길을 간 안도 다다오와는 다른 방법으로, 구마 겐고는 스스로 기존의 체계에 완전히 뛰어든 후, 그것을 부정하고 자기 건축을 이뤄낸 것입니다. 둘다 기존의 권위에의 도전이죠. 방법은 달랐습니다만.


  어떤 업(業)이든지, 본질에 집중하는 것이 답입니다. 건축도 그렇습니다. 사실 노출 콘크리트니 모더니즘이니 하는 것은 하나의 트렌드요 수단이지 본질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언제 부정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입니다. 건축의 본질은 인간과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풀어 가는 과정에서 안도 다다오는 (구마 겐고의 말에 따르면) 콘크리트라는 재료를 통해 어느 장소에서도 통용되는 건축을 했고, 구마 겐고는 그보다는 '그 장소에서만 할 수 있는 건축'이라는 테마에 주목했다는 차이가 있는 거지요. 누가 누구를 극복했고 잘했고를 떠나서 시대가 바뀌고, 둘다 건축의 본질에 집중했으나 단지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의 차이일 따름인 것이죠.


  구마 겐고는 여러번 자신의 건축을 약한 건축이라고 칭합니다. 일본이 강했던 시대의 강한 건축, 1,2,3세대 일본의 건축과들과는 반대로, 약해진 일본에서 태어날 수 밖에 없었던 탓에 그리고 오일 쇼크로 인해 건축의 미래마저 회의적인 시각으로 보는 이들이 많아진 변화 탓에, 약한 건축, 지는 싸움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기존의 것을 삐뚤게 보는 배짱이 있습니다. 안도 다다오처럼 장인들에게 호통치는 마초남은 아니지만, 자신의 출신-아메리칸 드림, 콘크리트, 샐러리맨-을 부정하면서 본인만의 건축을 모색하는 것은 '격투'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는 호전성이 있습니다. 세계화, 대량 생산의 트렌드에 건축마저 물들어 누구나 살 수 있는 건물,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건물이 아닌 그 장소에서만 가능한, 눈에 띄고 특별한 건축을 하는게 다음 시기의 건축가에게 요구되는 행위가 아닌가 하는 통찰력이 있습니다. 안도 다다오가 스스로를 게릴라로 정의하며 자신을 코너로 몰아세운 것과 같이, 구마 겐고 또한 자신의 건축을 '약한 건축'으로 정의하며 코너로 몰아 넣은게 아니었나 합니다. 코너에서의 절박함이 구마 겐고를 일본의 중심이 아닌 지방으로 향하게 했고, 또 세계로 진출하면서도 (획일화의 가면을 쓴)세계화에 정면으로 맞서 싸울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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