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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석환 Jun 17. 2022

프로 인정받는 날까지 내가 있을 곳 무대뿐

경남배우열전 (12) 창원예술극단 장은호 배우

'프로를 지향하는 아마추어.'

창원예술극단 장은호(57·창원연극협회 지부장) 배우에게는 이정표 같은 문장이다. 극단 대표를 맡아 단원들을 이끄는 그에게 이 같은 방향성은 오랜 연극 생애에서 팔딱팔딱 살아 뛴다. 우연히 연극과 연이 닿은 후로 수십 년간 배우의 길을 걸으면서 늘 품었던 생각이 "프로 못지않게 하고 싶다"였다. 연극만으로는 생계를 꾸릴 수 없어 직장에 다니며 이중생활을 할 때도, 금전 문제로 연극판을 떠나있을 때도 그랬다. 어떻든 이를 향한 갈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창원예술극단 장은호 배우.
한국철강 일하던 20대 청년
퇴근 후 연기 생활은 해방구

이렇다 할 꿈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그에게 연극이 스며들게 된 계기는 창원 마산합포구 추산동 길거리에 붙은 극단 어릿광대 단원 모집공고를 맞닥뜨리면서다. 이전 같았으면 조금도 관심 두지 않았을 공고에 이날따라 시선이 갔다. 그러고는 난생처음 극단 문을 두드렸다. 부산기계공고 졸업 후 창원공단 한국철강에 취직해 제관사 보조, 크레인 납품 관리업무를 맡아 일하던 21살 때 일이었다.

"그 당시 시급을 800원 가까이 준다고 했어요. 전남 완도가 고향인데 스무 살 때 창원에서 취직했어요.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는 방위산업체 병역특례 신청도 해서 군대에 가지 않고 직장에서 5년 넘게 일했어요. 그때는 서른 살이 되면 내 청춘이 다 가는 줄로만 생각하던 시기였거든요. 내가 선택한 일이지만 '이렇게 가는 게 맞나?' 싶었어요. 답답한 마음에 회사 선배를 따라 마산에 있는 절에 다녔어요. 그때 절에서 집에 가려면 지금은 없어진 극단 어릿광대 앞을 지나가야 했거든요. 1985년 3월쯤 단원 모집한다고 돼 있었어요.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극단 생활을 시작하게 됐죠."

창원예술극단 장은호.배우.


장 배우는 퇴근 후 무대에 오르는 삶이 '해방구' 같았다고 떠올린다. 밤을 지새우며 연습하고 다음 날 출근해도, 선배들에게 꾸지람을 들어도, 기쁜 마음으로 무대에 섰다. 타인을 연기하는 것이 어렵고 힘겨울 때가 많았지만, 관객 앞에 서면 설수록 무대에 오르는 재미가 컸다.

되도록 회사 잔업을 하지 않으려 했다. 칼퇴근을 고집했다. "잔업을 꼭 해야 하는 시절이었거든요. 5시에 땡하고 퇴근해버리면 회사에서 싫어하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일손 하나가 빠지니 좋게 볼 수 없을 테니까요. 그랬지만 저는 5시가 되면 바로 퇴근해서 극단으로 갔어요.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직장, 오후 6~11시까지는 극단에서 이중생활을 쳇바퀴 돌 듯이 했죠. 당시 회사에서는 공연 있을 때마다 표를 100장씩 사줬어요. 다른 지역 공연이 있을 때는 출장비를 지원해주기도 했어요. 일을 더 안 하고 극단으로 가는 생활을 계속했는데도 그럴 정도였으니 회사에서 저에게 신경을 많이 써줬던 것 같아요. (웃음)"


창원예술극단 장은호.배우.
창원 극단 미소 창단 주도
여러 부침 겪고 다시 연극판
극단 운영 대표로 새 도전


자신의 무대를 보러 온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게 좋았지만, 3년 만에 극단 어릿광대에서 나왔다. 당시 대표와 갈등 때문이었다. 연극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던 그는 같은 소속으로 활동하다 먼저 극단을 떠난 천영훈 배우(도파니아트홀 대표)에게 "창원에 새 극단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후 한국철강에 다니면서 알게 된 고대호 배우(극단 미소 대표) 등이 합류, 1989년 연극단체를 창단했다. 이름은 극단 미소. 미소 창단 멤버로 활동하며 5년 가까이 극단 운영에 관여한 장 배우는 동호인 체제로 극단을 꾸려나가는 데 한계를 느꼈다고 한다. 그 뒤 돌연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고 싶다"며 단원 생활을 끝내고 미소를 떠났는데 원하던 대학 진학에는 실패했다. 이후 연극판과는 거리를 두고 영업직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한동안 연극판을 떠나 있던 그가 다시 무대로 돌아온 건 1997년이다. 이때 이후로 장 배우는 지금까지 꾸준히 무대에 서고 있다. 지역 극단별로 돌아다니며 기회가 될 때마다 작품에 출연하고 있다. 그간 참여한 작품은 60~70여 편에 이른다.

이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첫 극단에서 만났던 2인극 <하나를 위한 이중주>를 꼽았다. 이 작품에서 다발성 경화증을 앓는 여성을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 역을 맡았는데 당시 그는 선배 배우에게 호된 훈련을 받은 뒤 무대에 섰다고 한다.

"성격이 그리 좋지 않은 선배가 한 명 있었어요. 그 선배와 같이 첫 극단에서 2인극을 마지막 작품으로 함께했어요. 성격은 안 좋았지만 대충하는 게 없는 분이었거든요. 같이 무대에 서면서 많이 배울 수 있었죠. 공부하는 걸 싫어해서 저는 책을 잘 안 읽거든요. 읽으려면 마음을 먹어야 볼 수 있어요. 그런데 당시 공연 때 더 잘하고 싶고, 캐릭터를 잘 알고 싶다는 생각이 막 들더라고요. 심리학 책과 연기론 책을 사서 읽고 그랬어요. 그렇게 공부하면서 무대에 서던 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창원예술극단 장은호.배우.


소속 없이 활동하던 장 배우는 지난 1월부터 새 도전을 하고 있다. 전임 현태영 대표 제안으로 창원예술극단 새 대표를 맡아 극단을 이끌고 있다. 창원예술극단 전체 단원은 20명 남짓. 장 배우는 이들과 함께하면서 늦어도 내년까지 창원에 소극장을 꾸려 작품을 지속해서 무대에 올릴 생각이다. 전용극장을 구해 관객과 소통하고 싶다는 게 그의 목표다.

"연극에는 특별함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된 뒤로 계속 이 길을 가는 중이지만, 사실 이렇게 오랜 기간 무대에 서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올해부터는 극단 운영을 맡게 돼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어요. 우리 극단에 소극장이 지금 없거든요. 관객들과 쉽게 만날 수 있는 소극장을 내년까지 만들고자 여러 사람과 접촉 중이에요. 우리 무대에서 여러 작품을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어요. 저도 힘 닿는 대로 무대에 계속 설 예정이에요. 배우 개인으로서는 꾸준하다기보다도 한 번씩 기억해주는 사람? 죽지 않은 배우? 사라지지 않았다는 말을 들어도 무척 감사할 것 같아요. 남들이 저희보고 '프로를 지향하는 아마추어다'라고 얘기하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모든 것을 프로 못지않게, 꿇리지 않게 하고 싶어요."



이 글은 경남도민일보 지면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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