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 쉽게읽기 20) 민주주의가 구조의 산물?

왜 그때, 왜 그렇게?

by 김광민

민주주의의 기원을 둘러싼 학문적 탐구는 정치학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 중 하나로, 구조적 결정론과 행위자 중심의 우연성 사이의 긴장 관계를 핵심으로 다루어 왔다. 이 논쟁의 중심에는 민주주의가 심대한 사회경제적 변혁의 정점에서 나타나는 필연적 결과물이라고 주장하는 구조적 전제조건론(structural prerequisite theory)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이론은 경제 발전, 도시화, 교육 수준의 향상과 같은 거시적 사회 변화가 민주주의 체제의 등장과 유지를 위한 필수적인 토대를 마련한다고 본다.


1960년부터 1987년까지 대한민국의 심대한 사회경제적 변혁은 구조 이론가들이 예측했듯이 민주주의를 위한 매우 비옥한 토양을 만들어냈지만, 민주화의 실제적 이행은 궁극적으로 정치적 우연성과 전략적 행위의 산물이었다. 대한민국의 사례는 구조적 조건이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일 수는 있으나 충분조건은 아니며, 정치적 행위의 장(arena)을 형성하고 행위자에게 힘을 실어줄 수는 있지만 최종적인 결말까지 결정하지는 못함을 명확히 보여준다. 즉, 구조는 민주주의라는 불꽃을 위한 ‘연료’를 제공했지만, 그 연료에 불을 붙인 것은 결국 ‘행위’였다.


부(富)와 민주주의의 전망


구조적 전제조건론의 지적 토대는 정치사회학자 세모어 마틴 립셋(Seymour Martin Lipset)의 1959년 기념비적 연구에서 시작된다. 그는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 사이에 강력한 통계적 상관관계가 존재함을 실증적으로 제시하며, “국가가 부유할수록 민주주의를 지속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명제를 확립했다. 립셋은 민주주의의 사회적 전제조건을 형성하는 '발전 복합체(development complex)'를 다음과 같은 핵심 요소로 설명했다.

립셋.jpg 세무어 마틴 립셋 교수


부(富)와 산업화 국가 소득의 증가는 거대한 빈곤층과 소수 엘리트로 구성된 피라미드형 사회 구조를, 거대한 중산층을 중심으로 하는 다이아몬드형 구조로 변화시킨다. 이러한 변화는 극단적인 계급 갈등을 완화하고, 정치적 타협의 가능성을 높인다.


도시화 인구가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하면서 전통적인 충성 관계나 공동체적 유대가 약화되고, 개인들은 근대적이고 복잡한 형태의 사회 조직에 노출된다.


교육 교육 수준의 향상은 시민들의 시야를 넓히고 관용과 같은 민주적 규범에 대한 수용성을 높인다. 또한, 시민들이 더 합리적인 정치적 판단을 내리고 복잡한 정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한다.


립셋의 이론은 단순한 상관관계를 넘어 민주주의로 이어지는 인과적 경로를 탐색했다. 경제 발전은 정치적 참여와 권리를 요구하는 더 크고 강력한 중산층을 육성한다. 또한 노동조합, 경영자 단체, 시민 단체와 같은 자발적 결사체들의 성장을 촉진하여 국가 권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는 시민 사회의 밀도를 높인다. 나아가 발전된 경제는 정권의 '효과성(effectiveness)'을 높여주는데, 이것이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정당성(legitimacy)'과 결합될 때 체제의 안정성을 보장하게 된다.


립셋의 연구는 이후 '내재적 민주화(endogenous democratization)'와 '외재적 민주화(exogenous democratization)'라는 중요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즉, 경제 발전이 권위주의 체제를 민주주의로 '전환'시키는가(내재적 이론), 아니면 다른 이유로 일단 수립된 민주주의가 경제적으로 발전된 국가에서 더 잘 '생존'하고 공고화되는가(외재적 이론)라는 문제다. 립셋의 초기 주장은 종종 내재적 이론으로 해석되지만, "민주주의를 지속한다(sustain democracy)"는 그의 표현은 외재적 관점 배척하지 않는다.


이러한 립셋의 거시 구조적 이론에 사회심리학적 미시적 기초를 제공한 학자가 바로 대니얼 러너(Daniel Lerner)다. 그는 저서 전통 사회의 소멸(The Passing of Traditional Society)에서 근대화가 개인 수준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했다. 러너에 따르면, 도시화는 문자해독률(literacy)을 높이고, 이는 다시 대중 매체에 대한 노출을 증가시킨다. 대중 매체에 대한 노출은 타인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 즉 '감정 이입(empathy)' 또는 '심리적 유동성(psychic mobility)'을 창출한다. 이 심리적 유동성이야말로 근대적 참여 시민이 갖추어야 할 핵심적인 자질이다. 러너의 이론은 립셋이 제시한 거시적 사회 변화가 어떻게 개인의 정치적 태도 변화로 이어지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연결고리를 제공한다.


계급, 연합, 그리고 혁명


립셋의 통계적 분석이 발전의 '결과물'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배링턴 무어 주니어(Barrington Moore Jr.)는 그의 역작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Social Origins of Dictatorship and Democracy)’에서 근대화로의 이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계급 갈등의 역사적 역학에 주목했다. 무어의 분석은 계급 관계에 깊이 뿌리내린 강력한 구조적 논증을 제시한다. 그는 근대 세계로 나아가는 세 가지 역사적 경로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무어.jpg 베링턴 무어 주니어


부르주아 혁명을 통한 민주주의 경로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 나타난 이 경로는 강력하고 독립적인 상공업 계층(부르주아)이 지주 귀족과 왕권의 힘을 약화시키는 혁명을 주도할 때 나타난다. 이 분석은 "부르주아 없이 민주주의 없다(No bourgeois, no democracy)"는 그의 유명한 격언으로 요약된다.


위로부터의 혁명을 통한 파시즘 경로 부르주아 계급이 취약하였던 독일과 일본처럼 강력한 지주 엘리트와 연합하여 정치 혁명 없이 경제 근대화를 추진하는 경우에 나타난다. 이 ‘반동적 연합’은 농민과 노동 계급을 억압하며 파시즘으로 귀결된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통한 공산주의 경로 러시아와 중국처럼 지주 엘리트와 국가가 상업 농업으로의 전환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거대하고 혁명적인 농민층이 구체제를 전복시킬 때 나타난다.


무어의 분석은 단순히 부르주아의 존재 유무를 넘어선다. 그는 민주주의로의 길이 열리기 위해서는 지주 귀족 계급이 폭력적으로 제거되거나, 스스로 상업 농업에 종사하는 계급으로 변모하여 그 억압적 성격이 약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농민층의 운명 또한 결정적이다. 그들의 혁명적 잠재력이 효과적으로 통제되거나 다른 방향으로 유도되어야만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이처럼 립셋, 러너, 무어의 이론은 서로 다른 분석 수준에서 민주주의의 구조적 전제조건을 설명한다. 립셋이 민주주의와 높은 상관관계를 보이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제시했다면, 무어는 계급 간 권력 투쟁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 각 사회가 어떻게 그러한 조건에 도달했거나 실패했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러너는 이러한 거시적 과정이 개인의 내면에 미치는 심리적 '변화'를 조명한다. 이 세 이론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를 보완한다. 따라서 이 통합된 구조적 틀을 통해 대한민국 민주화 과정을 분석하는 것은 단일 이론에 의존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다층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대한민국 민주화의 구조적 해부

경제 기적과 사회 변혁 (1960-1987)


1960년대 초,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으나, 박정희와 전두환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국가 주도의 압축적 산업화를 통해 경이로운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이 시기는 민주주의의 구조적 토대를 마련하는 결정적 과정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구체적인 데이터를 통해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1960년대 초 100달러 남짓했던 1인당 명목 국민소득은 민주화 직전인 1987년에는 3,500달러를 넘어섰고, 1989년에는 5,800달러를 돌파했다. 1962년부터 1989년까지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연평균 8% 이상의 놀라운 성장률을 기록했다. 산업 구조 역시 근본적으로 재편되었다. 1962년 국민총생산(GNP)의 14.3%에 불과했던 제조업 비중은 1987년 30.3%로 두 배 이상 증가하며, 한국이 농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완전히 전환했음을 보여주었다.


이 과정은 '권위주의적 발전국가 모델의 역설'을 명확히 보여준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은 민주주의를 억압하면서도 체제의 정당성을 오직 경제 성과에서 찾았다. 그러나 경제 발전을 위한 그들의 정책은 역설적으로 그들 자신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위협하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만들어냈다. 국가 주도의 산업화는 사회 구조를 복잡하게 만들었고, 새로운 사회 세력과 다양한 이익 집단을 출현시켰다. 립셋의 이론이 예측하듯이,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더 이상 단순한 물리적 억압만으로는 통치가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즉, 권위주의 정권은 빈곤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성공의 결과로 자신의 존립 기반을 스스로 허무는 새로운 문제, 즉 경제적 지위에 걸맞은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는 근대화된 사회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시민의 부상


경제 성장과 함께 진행된 급격한 사회 변동은 새로운 유형의 시민을 탄생시켰다. 산업화는 대규모 이촌향도 현상을 유발했고, 이는 폭발적인 도시화로 이어졌다. 1960년 35.8%에 불과했던 도시화율은 1990년 82.6%로 치솟았다. 특히 서울과 부산 같은 대도시는 인구 집중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는 정치적 저항 운동이 조직되고 확산되는 물리적 기반을 제공했다.


동시에 교육 혁명이라 불릴 만한 고등 교육의 팽창이 일어났다. 정부는 산업 발전에 필요한 숙련된 인력을 공급하기 위해 대학 교육을 장려했다. 1960년 약 10만 명이었던 고등 교육기관 학생 수는 1980년에는 60만 명을 넘어섰다. 특히 1981년 도입된 '졸업정원제'는 대학 입학 정원을 대폭 확대하여 1980년대에 막대한 규모의 고학력 청년층을 배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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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인구학적 변화는 민주주의의 전제조건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도시는 시위 조직과 정보 확산을 용이하게 했고, 대학은 민주화 운동의 이념적, 조직적 산실이 되었다. 교육 수준이 높고 도시에 집중된 이 새로운 시민층은 바로 립셋과 러너가 민주주의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던 바로 그 유형의 시민들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권위주의 정권의 일방적인 통치에 순응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정치 과정에 참여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지니게 되었다.


한국 중산층의 형성. "부르주아 없이 민주주의 없다“


배링턴 무어의 명제는 한국의 사례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한국은 고전적인 의미의 '부르주아 혁명'을 겪지 않았다. 대신, 국가 주도의 발전 과정에서 거대하고 영향력 있는 중산층이 인위적으로 형성되었다.


이 새로운 중산층은 월급을 받는 전문직, 화이트칼라 노동자(신중산층)와 자영업자(구중산층)로 구성되었다. 1980년대 초반 상대적으로 평등한 분배 구조 속에서 성장한 결과, 1986년 한국의 중산층은 전체 인구의 약 53%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발전국가 모델의 가장 큰 수혜자이자 체제의 안정적인 지지 기반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러 그들의 경제적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자, 관심은 점차 정치적 불만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치적 안정, 재산권 보호, 자의적인 국가 권력의 종식 등을 원하게 되었고, 이러한 이해관계는 자연스럽게 민주화 운동의 요구와 일치했다. 특히 1980년대 후반의 '3저 호황'은 중산층의 경제적 여유와 자신감을 더욱 증대시켜 그들을 거리로 나오게 하는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버블패밀리.jfif 1980년대 중산층의 확대


한국의 사례는 후발 발전국가에서 무어의 이론이 어떻게 변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한국의 민주화는 부르주아가 지주 귀족을 타도하는 형태가 아니라, 국가에 의해 육성된 중산층이 결국 그 창조주인 국가에 등을 돌리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는 무어의 모델이 주로 전(前)산업 사회의 계급 갈등에 기반하고 있는 반면, 한국의 산업화는 식민지 이후의 역사적 맥락에서 국가 주도로 이루어졌고, 이미 단행된 농지 개혁으로 구 지주 계급의 힘이 약화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권위주의 국가는 사실상 '근대화 엘리트'의 역할을 수행했다. 국가는 경제 정책의 도구로서 새로운 중산층을 육성했지만, 그 결과는 무어가 예측한 역사적 경로와 기능적으로 동일했다. 거대하고 교육 수준이 높으며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중산층이 임계점에 도달하자, 이들이 역사적으로 부르주아에게 부여되었던 역할, 즉 자유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핵심 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행위자의 기원은 달랐지만, 그 역사적 기능은 동일했다.


1987년의 단절: 행위, 우연성, 그리고 결정론의 실패

민주주의가 구조적 산물이라면, 왜 그때, 왜 그렇게?


구조주의 이론의 가장 큰 비판점은 행위자의 선택, 전략, 그리고 역사의 우연성을 간과한다는 데 있다. 구조 이론은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왜' 가능해졌는지를 설명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그 전환의 구체적인 '시기'와 '방식'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를 보인다.


1980년대 중반 대한민국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민주주의에 무르익었다면, 왜 하필 1987년 6월의 그토록 폭발적인 방식으로 전환이 이루어졌는가? 왜 1985년이나 1990년이 아니었는가? 이 시기들의 거시적 구조 조건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구조가 아닌, 단기적인 정치적 역학과 우연한 사건들의 연쇄 작용 속에서 찾아야 한다.


1987년의 민주화는 구조적으로 예견된 필연이 아니라, 우연한 사건과 행위자들의 전략적 선택이 빚어낸 극적인 결과였다.


방아쇠 1 (우연성) 1987년 1월, 대학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과 이를 은폐하려던 정권의 시도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폭로되면서 국민적 분노가 폭발했다. 이것은 구조적 요인이 아닌, 우발적인 사건이었다.


박종철.jpg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소재로 다룬 영화. 1987


방아쇠 2 (전략적 실책) 전두환 대통령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를 중단시킨 '4.13 호헌 조치'는 엄청난 정치적 오판이었다. 이는 국민의 열망을 오만하게 묵살하는 것으로 비쳤고, 그전까지 분열되어 있던 야권과 재야 세력을 단일 대오로 묶는 계기가 되었다.


방아쇠 3 (우연성 및 상징성) 대규모 시위가 예정된 6월 10일의 바로 전날인 6월 9일, 대학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중태에 빠진 사건은 민주화 운동에 강력한 순교자를 제공하며 시위의 열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이러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행위자들의 전략적 동원이 이루어졌다. 학생, 종교계, 야당 정치인, 그리고 결정적으로 넥타이를 맨 중산층 직장인들까지 아우르는 범국민적 연대체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가 결성되어 시위를 조직했다. 전국적으로 확산된 거대한 시위의 물결 앞에서, 그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염두에 둔 정권은 1980년 광주에서의 유혈 진압과 같은 선택을 반복하기 어려웠다. 결국 당시 여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는 위기를 타개하고 선거를 통해 집권할 기회를 엿보기 위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이는 억압이 아닌 타협이라는 전략적 선택의 결과였다.


구조적 전제조건론에 대한 비판적 재평가

1987년의 민주화는 구조적 요인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될 수 없다. 이 사례는 구조주의 이론의 내재적 한계를 명확히 드러낸다.


결정론의 문제 구조주의는 마치 민주화가 정해진 수순처럼 일어나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1987년의 결과는 매우 치열한 투쟁의 산물이었으며 결코 확정적이지 않았다. 만약 전두환 정권이 군대를 동원한 전면적인 유혈 진압을 명령했다면, 무르익은 구조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매우 달라졌을 수 있다.


시점의 문제 구조 이론은 왜 하필 1987년이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전환의 시점은 명백히 그해에 벌어진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행위자 역할의 과소평가 구조 이론은 정치 행위자들을 단지 구조적 힘의 전달자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시위대의 용기, 엘리트들의 전략적 계산, 그리고 분산된 세력을 하나로 묶어낸 리더십의 결정적 역할을 간과하는 것이다. 막대한 경제 발전을 이루었음에도 민주화되지 않은 중국의 사례는 근대화가 곧 민주화라는 결정론적 주장에 대한 강력한 반례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구조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구조적 변화가 민주화 전환을 직접 '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국가와 사회 사이의 '힘의 균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를 통해 민주화 세력의 행동이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1960-70년대에 국가는 주로 농촌에 기반을 둔, 교육 수준이 낮고 조직화되지 않은 사회를 상대했다. 이때 억압은 비교적 '저렴하고' 효과적인 통치 수단이었다. 그러나 1987년에 이르러 국가는 완전히 새로운 상대를 마주했다. 그것은 바로 막대한 규모의, 고등 교육을 받은, 도시에 집중된, 그리고 상당한 경제력과 조직력을 갖춘 중산층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사회 구조는 억압의 비용을 기하급수적으로 높였다. 대규모 유혈 진압은 경제를 마비시키고 체제의 핵심 지지 기반이었던 중산층을 완전히 적으로 돌려 정권의 성과 기반 정당성마저 위협할 수 있었다. 결국 구조의 궁극적인 역할은 결과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들의 전략적 계산을 바꾸는 데 있었다. 대한민국의 사회경제적 발전은 시민 사회에 힘을 실어주어 지속적이고 강력한 도전을 가능하게 했고, 동시에 정권의 선택지를 제약하여 억압보다는 타협을 더 합리적인 선택으로 만들었다. 구조는 정치라는 게임의 판을 새로 짰지만, 게임을 한 것은 결국 행위자들이었다.


구조는 토대, 행위는 설계자


대한민국 민주화 사례는 순수한 구조주의적 설명이나 순수한 행위자 중심적 설명 모두 불충분하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 사례는 구조와 행위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교과서와 같다. 수십 년에 걸친 근대화는 민주주의라는 연극을 위한 무대를 세우고, 소품을 마련했으며, 힘을 가진 배우들로 무대를 채웠다. 그러나 1987년의 극적인 사건들은 그 배우들이 실시간으로 써 내려간 각본의 결과였다.


따라서 우리는 구조적 조건이 민주화의 '가능성의 조건'을 창출하고, 정치적 행위가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지 여부와 그 방식을 결정한다는 통합적 이론 모델을 지향해야 한다. 구조는 민주주의라는 건물을 지을 수 있는 튼튼한 토대를 제공하지만, 그 건물을 실제로 설계하고 쌓아 올리는 것은 행위자들의 몫이다.

이러한 관점은 2024년 12월의 비상계엄 사태를 통해 다시 한번 그 중요성이 확인된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시도와 그것이 제도권 및 시민 사회의 신속한 저항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간 사건은, 1987년에 수립된 민주적 구조와 규범이 저절로 유지되는 것이 아님을 뼈아프게 상기시킨다. 민주주의는 그것을 지키기로 '선택'하는 입법부, 사법부, 그리고 시민과 같은 정치 행위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방어되어야 한다. 즉, 민주주의는 구조적으로 완성되는 종착점이 아니라, 구조적 토대 위에 시민과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설계와 보수를 통해 유지되는 지속적인 정치적 프로젝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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